매출 150억원대인 자동차 부품 업체 T사의 이모 대표는 사업을 시작한 지 37년 만에 처음으로 회사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다. 직원 30여명의 월급을 마련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수주가 30% 급감했지만 직원은 해고하지 않고 있다. 이 대표는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직원들을 지금 내보내는 건 다 굶어 죽으란 얘기"라며 "일단 버티고는 있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잘해야 두세 달 버틸 것"이라고 했다. 그는 "37년간 마이너스 통장 한번 안 쓰고 견실하게 사업했다는 자부심이 하루아침에 깨졌다"며 "만약 우리가 망하면 중국산이 이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GM에 부품을 납품하는 매출 300억원대 C사는 지난달 23일 글로벌 GM으로부터 "부품을 선적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코로나 사태로 GM의 북미 공장이 모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이달 들어 일주일에 하루 이틀 가동하는 게 전부인 이 회사의 이달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80% 급감할 전망이다. 이 회사 대표는 "운영비는 이미 다 떨어졌고 월급 주기도 힘들다"며 "은행에 갚을 돈도 있어 한 달 반 후 자금 경색이 올 것"이라고 했다.

9000곳이 넘는 국내 자동차 부품사는 한국 경제의 실핏줄 역할을 하고 있다. 자동차 업종에 취업한 38만명 중 25만명(65%)이 자동차 부품업 종사자다. 1인당 4인 가족을 가정하면 100만명의 생계를 책임지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이런 회사들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의 근간이 흔들리면서 장기 침체가 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100대 부품사 절반이 유동성 위기

국내 부품사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낭떠러지 끝에 와 있다. 본지가 한국의 100대 부품사(현대차 계열사 제외한 상장사) 중 작년 사업보고서를 낸 91곳을 전수조사 한 결과, 이 중 50.5%(46곳)가 '유동비율'이 100 이하로 집계됐다. 유동비율은 유동자산을 유동부채로 나눈 값으로, 100 이하면 대출 만기가 돌아왔을 때 현재 가진 현금 등 유동성 자산으로 다 갚을 수 없다는 뜻이다. 유동비율 100 이하인 46곳의 평균 매출은 5852억원으로, 대부분 중견 기업급이다.

부품사 91곳 중 25.3%(23곳)는 지난해 영업 적자였다. 평균 영업이익률은 1.4% 수준으로, 이자를 갚고 세금을 내고 나면 손실이 나는 수준이었다. 이 중 다수 업체는 영업 적자가 지속되면서 자본 잠식이 되고 있었다. 업계 관계자는 "덩치가 큰 회사들 상태가 이 정도니, 2~3차 부품사들은 빚으로 연명하는 좀비 기업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고용도 위기… 2년 만에 2만명 실직

위기에 내몰린 자동차 산업은 최근 고용 능력이 크게 떨어지고 있다. 2016~ 2017년 40만명을 유지해왔던 자동차 업종의 직접 고용자 수(고용보험 가입자)는 지난 3월 37만7000명으로 2년 3개월 만에 2만3000명 줄어들었다. 올 들어 3개월 동안에만 4000명이 직장을 잃었다. 자동차 산업뿐 아니다. 판매·정비·운송·주유·원부자재 등 자동차 산업으로 인해 먹고사는 전·후방 산업까지 합치면 178만명의 고용에 영향을 미친다.

업계에선 "어음 인수, 대출 만기 연장, 세금 감면 등 정부 지원이 없다면, 하반기 부품 업체들의 연쇄 도산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내연기관차에서 전기 자율주행차로 가는 자동차 산업 대전환기에서 '누가 끝까지 살아남느냐'의 '치킨 게임'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정만기 자동차산업협회장은 "비상 상황에선 일단 산업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기업들을 지켜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