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그리 쉽지는 않겠지./ 나를 허락해준 세상이란/ 손쉽게 다가오는/ 편하고도 감미로운 공간이 아니야." 전주도 반주도 없이 쨍하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도 날아오를 거야./ 작은 날갯짓에 꿈을 담아/ 조금만 기다려봐." '지징' 하는 일렉트릭 기타 소리와 함께 노래가 이어진다. 몸이 들썩거리는 응원곡 같은 노래는 애니메이션 '디지몬 어드벤처' 극장판 오프닝 곡 '버터플라이(butterfly)'. '디지몬 어드벤처'는 2000년 KBS에서 방영한 일본 애니메이션으로 '디지털몬스터(디지몬)'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험 이야기다. 당시 15%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포켓몬스터'와 함께 큰 인기를 끌었다.
그 '디지몬'이 20년 만에 돌아왔다. 지난달 6일 가수 전영호씨는 2020년 판 '버터플라이' 앨범을 제작하겠다며 크라우드펀딩(여러 개인에게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시작했다. 6주 만에 목표액(3500만원)의 38배인 13억4000만원이 모였다. 단 두 곡이 실린 앨범치고는 비싼 가격(3만5000원)이었지만, 2만7000명이 후원했다. 지난해엔 한국 방영 15주년을 맞은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성우 이용신씨가 주제가 앨범의 크라우드펀딩을 열었다. 7만명이 넘게 후원해 26억원을 모았다. 둘 다 TV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2030세대가 주축이 됐다. 애니메이션 주제가의 화려한 귀환이다. 촌스러운 애들 노래 취급받던 애니메이션 주제가에 사람들은 왜 열광할까.
발라드·댄스곡은 못 채워줘요
"발라드는 괜찮다고 위로만 하고, 댄스곡은 가사에 의미가 없어요. 누구는 직관적 가사가 '오글거린다'고 할지 몰라요. 날아오르자는 노래를 들으면, 뭐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들었어요." 3년간 서울 노량진에서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 조모(29)씨는 불안할 때마다 '버터플라이'를 재생했다고 했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는 "애니메이션 주제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만화 앞뒤에 붙는 1분 정도 분량에 그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고 했다. 그 메시지는 아이들의 모험과 성공이 주를 이룬다. 하재근 문화 평론가는 "아이들이 보는 만화는 대개 주인공이 역경을 헤치고 승리하는 줄거리다. 경험치를 한 칸 한 칸 쌓아 올라가던 주인공을 떠올리며 위로받을 수 있다"고 했다
어린이 시절엔 몰랐던 노래의 의미를 어른이 돼 발견하기도 한다. 김형빈(25)씨는 '이누야샤'부터 '원피스'까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줄줄이 꼽았다. "'이누야샤' 주제가 중 '마지막에 웃기 위해 우리들의 오늘을 기꺼이 이겨내 가자'라는 가사가 제일 마음에 와 닿아요. 어릴 땐 노래 좋은 줄 몰랐어요. 이젠 만화 내용보다 노래가 더 먼저 떠오를 정도예요." 그가 후렴구를 흥얼거렸다.
노래에 각인됐다, 가장 행복하던 그때가
2000년 매주 금요일 오후 5시, 당시 열 살이던 고민지(30)씨는 TV 앞에 앉아 '카드캡터 체리'를 기다렸다. "만날 수 없어, 만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벚꽃 잎이 물 위로 떨어지는 장면과 함께 시작되는 노래는 늘 설렜다. "만화도 재밌었지만, 주제가는 만화 시간을 알려주는 알람 같아서 기억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 지긋지긋한 출근 알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기다리던 시간을 알려주는 소리니까요." 고씨는 "카드캡터 체리는 술 마시고 꼭 부르는 인생 노래"라며 말했다.
국서라(27)씨는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노래방 애창곡이다. "'달빛천사' 주제가를 자주 불러요. 'Let's sing a song. 숨 쉬는 동안에 느낄 수 있게, 내게 내일이란 희망을 준 널 위해서.' 특히 이 부분을 부를 때 두근두근 가슴이 벅차요. 어렸을 때 투니버스(애니메이션 채널)에서 매일 보던 만화라 그때 추억이 떠올라요."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아이들에게 만화 주제가는 음악이라기보다는 만화가 곧 시작한다는 '신호'다. 매주 같은 시간대 반복해 들으며 노래가 각인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20년 전 만화 주제가가 탁월한 음악은 아닙니다. 투박할 정도로 순수한 행진곡풍 노래죠. 지금 듣는 세련된 음악과는 정말 달라요. 그런데 그 다름이 어린 시절의 설렘을 확 떠오르게 합니다." 정 평론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