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원으로 쌓아올린 거성(巨城)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연간 수십조원씩 전 세계 벤처 기업에 투자해온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의 손정의(孫正義, 일본명 손 마사요시·사진) 회장이 코로나 팬데믹(전 세계 대유행)에 휘청이는 것이다. 다급해진 손 회장은 지난 23일 소프트뱅크그룹의 보유 자산 4조5000억엔(약 50조9900억원)어치를 매각하는 긴급 처방을 발표했다. 이런 발표가 나오자 소프트뱅크그룹의 주가는 이틀 연속 상한가를 기록했다. 일단 발등에 떨어진 급한 불은 끈 셈이다.
24일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일본 신문에 따르면 소프트뱅크그룹은 최대 4조5000억엔의 자산을 팔아, 자사주 매입에 2조엔을 쓰고 나머지는 부채 상환 등 재무 안정화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확보한 현금은 다른 기업에 재투자하는 용도로는 쓰지 않는다. 손 회장은 "역대 최대 자사주 매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이달 초에도 보유 현금 5000억엔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계획을 밝혔다. 합치면 2조5000억엔어치의 자사주를 사들여 모두 소각하는 셈이다. 한 달 새 반 토막 났던 소프트뱅크그룹의 주가는 이날 19.5% 오른 3794엔(약 4만2977원)을 기록했다. 각국 정부가 코로나 사태에 천문학적 현금을 뿌리는 정책을 펴는 것처럼 손 회장은 막대한 현금 확보를 통한 '셀프 구제책' 마련에 나선 것이다.
◇부채 1400억달러 소프트뱅크
손 회장 위기의 원인은 1400억달러(약 174조8600억원)에 달하는 부채다. 지금까지는 소프트뱅크그룹의 보유 자산 가치가 월등히 컸기 때문에 크게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소프트뱅크그룹은 중국 알리바바, 일본 소프트뱅크, 미국 스프린트, 영국 ARM 등 세계 주요 기업의 주식을 포함해 27조엔의 자산을 갖고 있다. 손 회장이 주도하는 벤처투자펀드인 비전펀드1·2호가 각각 10조엔 규모다. 47조엔이란 돈으로 전 세계 유망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을 싹쓸이하다시피 인수하는 게 손정의 식(式) 투자였다. 자회사만 1140여 개에 이르는 손정의 제국이 건설됐다.
하지만 이 제국은 미즈호은행 등 일본 3대 은행에서 보유 주식을 담보로 한 무한대의 융자 위에 지어졌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소프트뱅크가 지난 5년간 은행 융자 수수료로만 20억달러를 썼을 정도로, 일본 금융권의 최대 고객"이라며 "소프트뱅크의 부채는 일본 은행의 위험한 짐"이라고 보도했다.
문제는 코로나 사태로 수많은 보유 주식의 가치가 일제히 급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25%의 지분을 보유한 알리바바는 두 달 새 주가가 23% 빠졌다. 소프트뱅크그룹 입장에선 40조~45조원이 허공에 날아간 셈이다. 여기에 기업공개(IPO)를 통해 현금을 만들어줘야 할 스타트업들은 코로나 사태로 상장이 미뤄지고 있다. 담보 주식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 금융권에선 대출금 회수설까지 나오고 있다.
벤처투자사의 한 심사역은 "소프트뱅크그룹은 40조원 안팎의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최근 신용평가기관에서 등급 하락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며 "등급 하락으로 회사채 발행을 제대로 못 하면 수십조원씩 갚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손 회장으로선 금융권과 신용등급회사, 주식 투자자 등에게 소프트뱅크그룹의 재무 건전성이 튼튼하니 안심해도 된다는 명확한 시그널을 줘야 하는 상황이다.
◇테크 버블 꺼지나
소프트뱅크그룹은 증시에서 매각이 비교적 쉬운 중국 알리바바나 일본 소프트뱅크의 주식을 팔 것으로 보인다. 손 회장은 한국에도 온라인 쇼핑몰인 쿠팡을 비롯해 당근마켓, 스푼라디오, 루닛 등 100여개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다. 비전펀드를 통해 쿠팡에 30억달러를 투자했고, 다른 100여 곳은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에서 3000억~4000억원 정도를 투자하고 있다. 쿠팡은 여전히 조(兆) 단위 적자를 내는 상태라, 당장 매각하기엔 부담스럽다. 다른 스타트업은 팔아봐야 현금 확보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소프트뱅크벤처스아시아의 이준표 대표는 "국민연금과 같은 투자자들의 자금을 포함하고 있어 한국 스타트업의 지분은 매각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그룹이 투자 확대 전략을 접으면서 세계 벤처 투자의 거품론도 나오고 있다. 비전펀드의 운영자금은 세계 벤처캐피털 운영자산(8030억달러 추정)의 26%(2080억달러)를 차지한다. 지난 1~2개월 동안 비전펀드의 스타트업 투자는 사실상 스톱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소프트뱅크그룹의 투자 전략이 확장에서 축소로 전환하는 기로에 섰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