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순천(順天)이란 지명은 ‘하늘에 순응한다. 하늘을 따른다’는 의미를 담았다. 순천 출신 유명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 조용헌씨는 “순천의 산은 험하게 생긴 바위산이 아니다. 무난하게 생긴 산들이면 사람들의 심성도 역시 무난하다”고 했다.
고분고분하던 순천은 지난 총선에서 잇따라 ‘반란’을 선택했다. 민주당의 텃밭이나 다름없는 전남 핵심 지역에서 국회 본회의장에 최루탄을 투척한 김선동(민노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복심 이정현(새누리당)을 선택하며 전국을 놀라게 했다. 19대, 20대 순천 지역구 국회의원은 민주당 출신이 아니었다. 민주당은 2011년 4월 치러진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 이후 10년간 자당 당선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민주당 주요 당직자는 “전남 동부권에 자리한 순천은 목포를 중심으로 한 전남 서부권과 달리 개방적인 성향이 뚜렷한 도시”라며 “중앙당 입장에서 보면 성향이 독특한 곳이라 선거전략 짜기가 난해하다”고 말했다.
4·15 총선을 앞두고 순천은 분구가 유력했다. 인구가 선거구 상한선을 넘어 선거구가 두 개로 나뉠 전망이었다. 순천시 인구는 지난해 1월 말 28만1347명으로 선거구 상한선 27만명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등이 순천시의 분구를 제안한 선거관리위원회의 획정안을 손바닥 뒤집듯 무효로 했다.
국회는 지난 7일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순천시 동·면 25곳 가운데 해룡면 인구 5만5000명을 떼 순천·광양·곡성·구례을 선거구에 붙인 것이다. 개정된 선거구는 인구 5만5000명의 해룡면이 광양으로 통합돼 해룡면 유권자들은 순천이 아닌 광양·곡성·구례 선거구에 출마한 후보를 뽑게 됐다. 사실상 특정 후보자나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결정하는 ‘게리맨더링’이다. 우리나라는 법률로 선거구를 정해 게리맨더링을 금지하고 있다.
순천은 요즘 부글부글 끓고 있다. 민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최루탄을 터뜨린 김선동의 도시에 민주당이 ‘기형적인 선거구 쪼개기’란 폭탄을 터뜨린 탓이다.
순천 시민사회단체와 해룡면 주민들은 지난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기형적이고 변칙적인 선거구 쪼개기 백지화하라”고 했다. 이들은 전날에도 순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순천시민한테 광양 의원을 뽑으라니 말이 되느냐. 주권을 침해당한 해룡면민의 투표권을 보장하라”고 했다. 이들은 또 “정치 셈법이 반영된 게리맨더링의 일종인 순천 쪼개기를 철회하라”고 했다. 순천시민 주권회복을 위한 순천 시민대책위원회는 지난 17일 순천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선거구 획정 원천 무효”를 주장했다. 자영업자 김모(47)씨는 “우리는 뗐다 붙였다 하는 장난감 레고가 아니다”라며 “이번에 오만한 집권당인 민주당을 심판하겠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비판에 가세했다. 무소속 이정현 의원은 지난 9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순천 시민입장에서는 침대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의 발을 침대에 맞춰 잘라냄을 당했다”며 “해룡 주민은 한번 쓰고 버림받는 비닐우산 취급당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했다. 이 의원은 “기형적인 선거구 획정 내용은 당연히 임시고, 잠정이다. 다음번에는 또 바뀔 것”이라며 “이런 발상을 한 사람들은 다른 지역민 다른 국민도 똑같이 하찮게 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선거구 쪼개기에 반발해 순천의 임형태 변호사는 소송인단을 모집하며 헌법소원을 추진하고 있다. 임 변호사는 “법은 만인 앞에 평등한 것이 기본 원리인데 이번 획정안은 순천시를 특정해서 예외를 만든 규정으로 법의 기본원칙에 반한다”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소송인단을 모집하고 나서 이르면 4월 초 헌법소원을 제기할 계획이다. 민중당 김선동 예비후보도 헌법소원에 나섰다. 김 예비후보는 “2개 선거구로 분구해야 할 순천시를 분할해 해룡면을 떼어낸 것은 헌법 규정을 어긴 것”이라며 “빼앗긴 순천시민의 주권과 국회의원 1석을 되찾겠다”고 말했다.
기형적인 선거구 획정에 이은 민주당의 전략공천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민주당은 지난 5일 공천관리위원회를 열고 순천을 전략선거구로 지정했다. 이후 소병철 전 법무연수원장을 전략공천했다.
민주당 예비후보였던 노관규 전 순천시장은 “김대중 전 총재 이후 단 한 번도 전남에 전략공천이 없었다”고 반발했다. 노 전 시장은 지난 19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순천·광양·곡성·구례갑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이번 선거는 오만하고 일방적인 정치폭력을 행사한 거대 기득권 세력인 민주당 이해찬 무리와의 싸움”이라며 “시민과 함께 나서 싸우겠다”고 밝혔다. 노 후보는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해야 하는 선거구를, 순천의 핵심지역인 해룡면을 찢어 23만명의 선거구로 짓뭉개버렸다”며 “민주당 이해찬 지도부가 주도한 중앙정치권의 일방적이고 폭력적인 행태에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해룡면 출신 민주당 소병철 예비후보는 지난 17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고향인 해룡면이 선거구에서 떨어져 나가 마치 제 오른쪽 다리가 잘려나간 것 같았다”며 “21대 국회에 진출해 원상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순천에선 “순천(順天), 결국 불천(不天)!”이라는 자조가 나온다. 하늘에 순응했으나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권을 향한 믿음이 사라지고 불신이 팽배해졌다. 순천에서 성장한 김승옥은 순천만을 배경으로 한 소설 ‘무진기행’을 썼다. 김승옥은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물”이라고 했다. 순천은 안개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