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미네소타대 학생 이지환(23)씨는 얼굴에 마스크를, 손에 파란 의료용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는 "밀폐된 비행기에서 혹시 몰라 장갑을 꼈다"고 했다. 미 동부 펜실베이니아주립대 3학년인 조민욱(25)씨는 이날 34시간 걸려 귀국했다. 뉴욕이나 워싱턴 등 미국 동부 도시에서 한국행 비행기표를 구할 수가 없어 서부 도시인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돌아온 것이다.
미국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확산하면서 유학생들과 교민들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한국으로 몰리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으로의 역(逆)유입 러시가 벌어지는 것이다. 유학생이 대거 역유입 대열에 포함됐다. 미국 대학들이 대면 강의를 온라인 강의로 전환하거나 아예 9월 개강으로 미루고 기숙사마저 폐쇄하자, 혼자 남게 된 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오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미국 내 한인들 사이에선 "비행기 값이 얼마가 들든, 갈 거라면 지금 당장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미국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고 방역 우려가 제기되면서, 한국이 곧 미국발 승객을 입국 금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퍼지고 있다.
현재 미국 주요 공항에서 한국으로 오는 항공편의 예약률은 90% 선이다. 평상시 1500달러 수준이었던 이코노미 직항 항공권 가격은 2~3배가량 뛰었다. 그나마 표도 없다. 오는 28일 워싱턴에서 인천으로 오는 대한항공의 직항 편도 티켓 가격을 23일 검색해 보니 이코노미 항공권은 모두 매진 상태이며, 1만136달러(약 1290만원)짜리 일등석만 남아 있었다. 평상시보다 수요는 늘었는데, 오히려 코로나 사태 이후 항공편은 줄었기 때문이다.
국내 공항에서 입국자를 대상으로 한 검역에서 확진되는 환자도 최근 급증했다. 방역 당국에 따르면 지난 22일 기준 공항 검역에서 확진된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는 47명으로, 닷새 전인 17일(11명)보다 4.3배로 늘었다.
최근 한국발 미국행 비행기나 미국발 한국행 비행편을 이용한 이들에 따르면, 전례 없는 '미국 엑소더스(Exodus·대탈출)'란 말이 떠오를 정도다.
일단 한국발 미국행 비행 수요는 확 줄었다. 관광이나 방문, 단기 유학은 물론 출장 등 불요불급한 미국행 일정은 올스톱됐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 LA·뉴욕 등으로 가는 항공편이 절반 이하로 감편됐는데도, 자리가 절반도 차지 않아 이코노미석에도 코로나 방역을 이유로 한 자리 건너 한 명씩 앉는다고 한다.
반면 미국에서 한국으로 1000만원대까지 치솟은 직항 편도 항공편은 여유 하나 없이 만석(滿席)이라고 한다. 최근 LA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교민 주부는 "승객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아 없던 병도 감염될 것 같아 내내 스트레스를 받았다"며 "어떤 분은 꺼림칙하다며 기내 화장실조차 가지 않고 10시간 넘게 참고 있더라"고 말했다.
한 교민 사이트에선 "비싸게 한국행 표를 구하긴 했는데 기내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이 올라오자 '밥 먹을 때 빼곤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어라' '짐 싣는 선반, 좌석, 화장실 문 손잡이 등에 바이러스가 묻어 있을지 모르니 비닐장갑을 껴라' '알코올로 식판과 시트 등을 닦으라'는 등 조언이 쏟아졌다.
미국 내 한인들이 두려움을 느끼는 건 여러 이유다. 일단 유학생들의 경우 어린 나이에 혼자 지내며 학교라는 안전한 공간에조차 기댈 수 없게 된 상황이 불안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미 하버드대·예일대·MIT 등은 이달 중순부터 3월 개강을 미루거나 온라인 강의로 대체하고, 기숙사도 급히 폐쇄했다.
미국에 유학 중인 대학원생 딸을 둔 한 부모는 "학교가 지난 10일 '15일까지 닷새 안에 기숙사를 비우라'고 통보하자 어린 학부생 중엔 서로 끌어안고 엉엉 우는 애들도 있었다더라"고 전했다. 미 애리조나주립대 교환 학생으로 가 있다 23일 귀국한 김지유(여·22)씨는 "아직 학기가 남아 있지만 서둘러 나왔다"면서 "학교에서도 외국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돌려보내는 분위기"라고 했다.
유학생뿐 아니라 이미 미국에 정착한 교민들도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단순히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 우려뿐만 아니라, 미국의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면서 외국인 등이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퍼지고 있다고 한다.
교민들은 "식당은 문을 닫고 휴지와 의약품 등 생필품도 미국인들 사재기 탓에 구하기 힘들다" "만에 하나 코로나에 걸리면 건강보험이 변변치 않아 치료비 폭탄이 걱정된다"고 전한다. 최근 트럼프 정부가 발표한 '1000달러 긴급 지원책' 같은 것도 미국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정책이라, 영주권자나 유학생, 단기 근로자 등은 생계가 위협받아도 기댈 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이날 일본이 미국을 입국 제한 대상국으로 지정한 것도 미국에 거주하는 유학생과 교민의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한국 정부도 언제 문을 걸어 잠글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최근 미국 등에서 급증하는 동양인 증오 범죄도 교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교민 사이트엔 "트럼프가 자꾸 코로나를 '중국 바이러스'라고 부르는데, 한국인·인도인 등 동양계를 향한 증오 범죄가 퍼질까 봐 두렵다" "생필품 유통난이 장기화되면 약탈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데, 우리 같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수퍼마켓 등이 표적이 될 수 있다. '제2의 LA폭동'이 올 수 있다" "우리도 미국인들처럼 총을 사둬야 하는 것이냐"는 글이 줄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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