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엔 한자만 쓰다가 근대에 와서야 한글 전용이 시작됐다고 흔히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 후기는 이미 한글 시대였죠. 정부 공식 문서나 양반 사대부들의 저술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한글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정창권(53)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초빙교수가 지난달 펴낸 '천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돌베개)는 추사 김정희(1786~1856)와 그 일가 사람들이 5대(代)에 걸쳐 주고받은 한글 편지 85통 전체를 현대어로 옮긴 책이다. 어머니가 아들딸에게,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친지의 안부를 묻고 집안 살림을 의논하는 편지에서 18~19세기 조선의 일상에 뿌리내린 한글의 면모가 드러난다. 여성들이 부지런히 편지를 주고받은 점도 특징. 최근 만난 정 교수는 "당시 여성과 소통하기 위해선 한글이 필수였다"면서 "한글이 퍼져 나가면서 조선 후기에 꽃핀 다채로운 문화의 배경이 됐다"고 했다. 조선시대 한글 소설을 전공한 정 교수는 '유물로 보는 한글의 역사'(공저) 집필에 참여하는 등 한글의 시대사를 꾸준히 연구해왔다.

붓으로 흘려 쓴 편지는 한글인데도 '번역'하기가 한문보다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한글은 말이 나오는 대로 썼습니다. 요즘 채팅 비슷하죠. 띄어쓰기도 없어서 한 문장이 한 페이지가 돼 버리기도 했습니다." 말의 의미가 시대마다 달라지는 문제도 있었다. 정 교수는 "조선 중기에 처가살이하는 남성이 본가에 다녀가는 일을 가리키던 '근친'이 후기에는 여성의 친정 나들이로 뜻이 바뀐다"고 했다.

제주 유배 시절 추사를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 앞에 선 정창권 고려대 초빙교수. “조선 후기 사회상을 밝히기 위해 한글 자료들에 대한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위). 유배지 제주에 북어를 보내달라며 아내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아래 왼쪽)와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며느리에게 보낸 편지의 봉투(오른쪽).

해독한 편지의 행간에선 추사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 정 교수는 "퇴계(이황)나 다산(정약용)의 편지엔 꾸중이나 훈계가 많은 반면 추사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고 했다. 추사의 한글 편지 40통 중 38통이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것이다. 추사는 온양 친정에 근친 간 아내와 장모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아내의 답장이 늦어질 땐 '나는 마음이 매우 섭섭하옵니다'라며 서운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제주도 유배 시절엔 옷이며 반찬을 아내에게 부탁하는 편지가 많다. '대님을 하나 접어 보내게 하옵소서' '북어도 좋은 것으로 두어 쾌 부치게 하옵소서'. 정 교수는 "이를 두고 추사가 까칠한 성미였다고도 하지만, 아내에게 시시콜콜한 일까지 얘기하면서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고 했다. 그는 또 "추사는 아내에게 '하옵소서'라고 극존칭을 썼다"며 "당시 여성들도 존중받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했다. "조선 후기가 극단적 가부장제 사회였다는 통념은 일제 시대에 '조선시대 여자들은 고분고분했는데 요즘 여자들은 드세다'는 식으로 신여성을 억압하기 위해 꾸며낸 허구라고 봅니다."

조선 후기의 여성은 마냥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며 한글 콘텐츠의 생산·유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게 정 교수의 견해다. 예컨대 세책가(貰冊家·도서 대여점)의 인기 콘텐츠였던 한글 소설은 주요 필자와 독자가 여성이었다. "대표적 인기작이었던 '완월회맹연'은 소론 집안의 '이씨부인'이 썼습니다. 소설을 써서 최고의 영예를 얻겠다는 포부까지 남겨놓았죠. 대갓집 여성들이 180권씩 되는 이런 소설들을 요즘 TV 연속극 보듯 즐겼습니다."

정 교수는 "여성과 소통하기 위해 남자들도 예닐곱 살이면 교양으로 한글을 깨쳤다"면서 "한글이 보편화되면서 서민층에서 영웅소설이나 판소리계 소설 같은 작품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의학책·요리책처럼 대중적 전파가 필요했던 실용서들도 한글로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한글 자료 중엔 아직 연구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지금의 상식과는 또 다른 시대상이 드러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