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국가산업단지(여수산단)는 현재 우리나라 최대 석유화학 산업단지다. 국내 석유화학 생산과 수출에서 전국 1위답게, 국내 정유 정제 능력 25%, 에틸렌 생산량 46%, 비료 생산량 32% 등을 차지한다. 단일 규모 석유화학단지로 동양 최대이자 세계 1위라는 수식어도 붙어 있다.
여수산단은 국내 30여개 국가산업단지 중 탑 3위 자리를 항상 유지한다. 2019년 12월 기준 가동률(50인 이상 사업장)은 1위(93.2%), 누적 생산액은 2위(60조8582억원), 입주한 사업체 중 300인 이상 기업 규모는 4위(28개사), 고용은 8위(2만4148명) 등이다. 생산액에 비해 고용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장치 산업 속성 때문이다. GS LG 한화 롯데 등 대기업 중심 석유화학 관련 공장들이 수직 계열화돼 있는 게 특징이다.
세계적 규모의 여수산단 단초(斷礎)는 GS칼텍스 여수공장에서 비롯된다. 당시 정부는 1962년 2월 울산 정유공장(현 SK에너지) 기공 후 석유화학 관련제품 수입대체와 에너지 수요 증가를 고려해 제2정유공장 건설을 계획하고, 이를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포함한다. 그리고 1966년 4월 11일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순시 차 전남도청을 방문해 당시 여천이 제2정유공장 건설 최적지라고 말한다. 11월 17일 미국 칼텍스(Caltex)와 합자 투자한 '호남정유'가 제2정유 사업자로 선정된다. 1967년 2월 호남정유 공장 기공식이 열리고, 1969년 6월 준공된다.
호남정유가 여수로 오게 된 배경에는 정치적 요인이 한몫을 한다. 1967년 5월 치러질 제6대 대통령 선거를 의식한 정치적 의도의 결과라 해도 틀리지 않다. 1963년 10월 실시된 제5대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는 민정당 윤보선 후보보다 전남·북에서 표를 많이 얻는다. 그런데 제6대 대선을 앞두고 호남을 차별한다는 '호남 푸대접론'이 등장한다. 울산을 비롯한 영남 중심 개발에 호남 주민이 반발한 거다. 박 대통령 재선 가도(街道)에 악재라고 인식한 당시 정부는 울산과 남해안으로 연결된 여천을 택한다. 호남정유 기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치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2정유공장을 이곳에 설치하게 된 것은 호남지방이 특별히 공업시설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호남정유 공장 준공은 오늘날 여수산단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73년 정부는 여수를 울산에 우리나라 '제2석유화학공업단지'로 지정한다. 하지만 여수가 쉽게 선정된 것은 아니었다. 건설 대상지를 놓고 광양만 쪽도 검토됐기 때문이다. 여수가 광양만보다 유일한 공업용수 공급원인 섬진강과 지리적으로 멀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호남정유와 직간접적으로 연계된 동종(同種) 기업과 연관성, 항만 발전소 등 산업 인프라 축적 등에서 비교우위를 가진 호남정유 주변 지역이 낙점된다. 호남정유가 제2석유화학공단을 여수로 견인한 일등 공신인 셈이다.
여수석유화학공단 건설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된다. 1973년 11월 낙포리 일대 제7비료공장 단지 조성 착공식이 열리고, 1974년 4월 공장용지 항만 도로 철도 용수 주거지역 등 종합적인 개발구역(572만평)이 확정돼 공단 건설 밑그림이 그려진다. 1973년 11월 제7비료단지를 시작으로, 중흥 평여리 일대 석유화학단지(1974~1983), 화치 주삼리 일대(현 LG화학 등) 석유화학연관단지(1974~1979), 삼일항 배후단지(1974~1986), 현재 한국바스프 금호가 있는 화치단지(1977~1981) 등의 조성도 시작된다. 1976년 12월엔 여천공업기지로 명칭이 바뀌고 단지 규모(985만평)도 확대된다.
단지 조성과 함께 관련 공장의 착공과 준공이 계속된다. 1976년 호남석유화학 호남에틸렌 한양화학 한국다우케미컬 등의 공장이 착공되고, 대성에탄올 동해가스 여수화력발전소 등이 완공된다. 1977년에는 단일 공장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남해화학 여수공장을 비롯해, 방주탄산, 럭키 여천공장 등이 완성된다. 1978년 한국합성고무공업과 금호석유화학 여수공장이 착공한다. 1980년대 들어 평여단지(1차~2차), 월하단지(2차), 공유수면을 배립한 용성단지 등의 조성 사업이 이뤄지면서 현재의 여수국가산단 모습이 거의 갖춰진다. 20여년 만에 중화학공업 불모지였던 전남에 거대한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만들어진 거다.
그런데 1980년대 초에 새로운 낭보가 지역에 전해진다. 1981년 11월 제2제철소(현 광양제철소) 건설 대상지로 광양만이 선정됐다는 뉴스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전(死前)부터 제2제철소 건설 후보지를 놓고 아산만(충남), 영일만(경북), 광양만(전남)은 경쟁했는데, 결국 광양만으로 확정된 거다. 광양만이 대형 선박 출입이 용이한 양항(良港)이라 공사비 절감이 가능하다는 이유가 결정적이었다. 여수로 호남정유 공장이 입지한 것과 같은 이유였다. 여수산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제2제철소가 광양만으로 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광양만권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1985년 정부는 '광양 컨테이너 부두'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1997년 12월 1단계 사업(4선석)이 완공돼 개장한다. 이로써 광양만에 여수산단~광양컨부두~광양제철소가 'C자형'으로 배치된다. 환형의 산업 인프라 축적은 2003년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 지정으로 연결된다. 환형으로 배치된 산업 인프라 덕분에 광양만권은 우리나라 명실상부한 신(新)산업공간 중심지로 자리 잡는다. 이 모든 기적이 1967년 착공한 제2정유공장이 여수산단을 잉태한 결과다.
현재의 GS칼텍스 공장이 여수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광양만권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은 어렵지 않다. 인근 경남 사천만 일대와 비교하면 된다. 제2제철소는 광양이 아닌 충남 아산만 차지가 됐을 거다. 광양컨부두,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 율촌산단 등은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거다. 2012여수엑스포와 이순신대교도 마찬가지다. 현재 시가지가 연결되어 하나의 단일 경제권 생활권을 유지하고 있는 여수 순천 광양의 '트라이앵글 도시(triangle cities)' 출현도 불가능한 일이다.
여수산단은 광양만권 변화를 만들어 낸 인큐베이터였다. 동시에 광양만권 성장과 발전을 추동한 기관차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광양만권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그 해답은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의 의지와 노력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