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 이상재와 신석우·안재홍 같은 민족 지사들이 조선일보에 없었다면, 일제 최대 규모 항일운동 단체인 신간회는 오늘날 역사책에서 찾아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1927년 1월 초 신간회 창립을 위해 저항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자들이 첫 모임을 가진 곳이 조선일보 사옥이었다. 다음 달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YMCA) 강당에서 열린 신간회 창립 대회에서도 월남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다.
신간회와 조선일보는 사실상 출발부터 한몸이었다. 조선일보는 이상재·안재홍·신석우·장지영 등 간부 9명이 신간회 발기인과 간사로 뛰어들었다. 신간회는 창립 직후 전국 140여개 지회를 설립했고, 일본 도쿄·오사카에도 지회를 조직했다. 회원 수만 4만여 명에 이르렀다. 전국 각지 신간회 지회와 분회는 조선일보의 지사·지국 사무실에 설치됐다. 신간회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자강,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 청소년·여성의 형평 운동 지원, 파벌주의·족보주의 배격 등 근대적 가치를 앞세웠다.
나라 뺏긴 일제강점기에 탄생한 민족지는 저항과 계몽 두 과제를 처음부터 짊어졌다.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물산장려운동을 주창했고, 우리말과 문화 말살 정책에 대항해서 교육과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조선민립대학 발기(發起)에 취(就)하야, 후진을 위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 1922년 12월 1일 자에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에 대학이 없음을 개탄하면서 민간이 대학을 세워 최고의 인재를 기르자는 운동이었다. 조선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적극 보도했다. '민립대학 운동 기관지'란 얘기를 들을 정도였다.
1920년 8월 23일 조선일보는 평양의 조선인들이 일본인 상점에서 물품을 사지 않기로 결의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상품의 비매(非買) 동맹. '짧은 기사였지만 파장은 엄청났다. '조선의 간디'로 불리는 고당 조만식(1883~1950)을 비롯한 평양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근검절약과 국산품 애용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추진했던 물산장려운동의 출발점이었다. 평양에서 시작된 물산장려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1923년 '조선사람 조선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조선물산장려회가 출범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해 2월 16일 자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행렬을 금지한 일제의 방침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가 일제에 맞서 싸웠던 정신적 무기(武器)이자 끝까지 지켜내고자 했던 민족의 얼이 한글이었다. 일제강점기 최대 민중 계몽운동으로 평가받는 문자보급운동이 대표적이다. 장지영은 1929년부터 조선일보 편집인과 문화부장으로 문자보급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스승이 국어학자 주시경(1876~1914) 선생이다. '우리말과 글을 잊으면 민족의 정신과 문화마저 빼앗긴다'는 주시경의 정신은 제자 장지영에게 이어졌다. 장지영은 '한글원본'과 '한글원번' '문자보급교재' 등 조선일보의 교재를 직접 제작했다. 2011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이 3점은 현재 서울 흑석동 신문 박물관 '뉴지엄'에서 전시하고 있다.
민족지들의 문맹 퇴치 운동은 당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한 열네 살 장준하(1918~1975)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때부터 나는 신문을 높이 보게 되었으며 인연 깊은 나의 지도자적 대상으로, 아니 당시 우리 온 겨레를 지도하고 있는 존재로 아주 믿어버리게 되었다. (중략) 이 두 신문만이 캄캄한 우리 조국을 비춰주던 유일한 등불이었으며 희망이었다."
일제강점기 민족 지사와 문인들은 민족지의 폐간에 눈물 흘렸고, 광복 이후 복간에도 함께 기뻐했다. 1940년 조선일보 강제 폐간 소식을 접한 만해 한용운은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라는 한시(漢詩)를 남겼다. 광복 이후인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조선일보가 왜적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과 국권의 회복을 위해서 분투항전(奮鬪抗戰)한 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히 여겨온 바"라는 복간 축하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귀국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은 '유지자사경성(有志者事竟成·뜻을 지닌 자 성취할 수 있다)'이라는 조선일보 복간 축하 휘호를 써 보냈다.
민족의 내일을 설계하고 일군 조선일보의 캠페인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환경·IT·통일 등 미래지향적인 화두를 제시하기 위해 힘썼다. 1992년 조선일보는 '쓰레기를 줄입시다'라는 친(親)환경 캠페인을 시작했다. 우유팩·빈병·폐지·캔 등 생활용품의 재활용을 통해서 쓰레기 배출량을 줄이자는 실천 운동에 3640개 사회단체가 동참했다. 조선일보의 환경 캠페인은 1993년 '배기가스 줄입시다', 1994년 '샛강을 살립시다'로 계속됐다. 1995년에는 일본 마이니치신문과 함께 '한일 국제 환경상'을 제정했다.
IT 강국의 초석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 조선일보 캠페인이 1995년 정보화 운동이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당시 캠페인 구호는 지금도 널리 회자된다. 이듬해 '어린이에게 인터넷을'이라는 '키드넷(kidnet)' 운동으로 이어졌다. 미래 세대가 생활하는 학교 교실이 정보화 교육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공감했다.
2011년 '자본주의 4.0' 기획을 통해서 한국 경제의 양극화 문제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고, 2012년 '술에 너그러운 문화, 범죄 키우는 한국' 시리즈를 50여 회에 걸쳐 보도하며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음주 문화에 제동을 걸었다
2014년 시작한 '통일이 미래다' 캠페인은 유라시아 자전거 통일대장정, 2015년 통일과나눔 재단 출범과 통일나눔펀드 운동으로 이어졌다. 2015년 출범한 통일나눔펀드는 170만명이 기부에 참여해 3137억원을 모금했다. 통일을 준비하고 앞당기기 위한 순수 민간운동의 구심점으로서 탄생한 재단은 통일을 위해 일하는 민간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신춘문예·영화제 국내 처음으로 시작… 국악·연극·미술… 전방위로 문화 지원]
조선일보 100년사는 한국 근현대 문화사와 거의 겹친다. 문화건설(文化建設)은 1933년 제정한 조선일보의 사시(社是) 중 하나다.
1927년 12월 조선일보는 국내 최초로 신춘문예를 시작했다. "흰옷 입은 동무들이 힘찬 형세로 싸움터에 나갈 수 있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 사람 이상을 위해 싸워본 이야기"를 써달라는 공모 사고부터 의미심장했다. 일제에 맞선 한민족의 투쟁에 빗댄 것으로 해석 가능했기 때문이다.
신춘문예는 한국 문인들의 등용문이 됐다. 백석의 '그 모(母)와 아들'(1930), 박영준의 '모범경작생'(1934), 김유정의 '소낙비'(1935), 김정한의 '사하촌'(1936), 정비석의 '성황당'(1937) 등이 대표적이다. 광복 이후에도 전상국(1963), 최인호(1967), 황석영(1970), 김인숙(1983) 등이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조선일보는 1955년 제정됐다가 10여년간 중단됐던 동인문학상을 1987년부터 주관하고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1938년 11월 조선일보는 '영화제'를 개최했다. 국내 첫 영화제였다. 이 전통은 1963년 11월 청룡영화제로 이어졌다.
광복 이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전시회에는 폭발적인 관람 인파가 몰려들었다. 1985년 로댕 조각전은 22만5000명이 들었다. 1993~1994년 '아! 고구려전'을 본 관람객은 전국 358만명이었다. '이중섭 미술상' '방일영 국악상' '이해랑 연극상' '차범석희곡상'도 최고 권위의 예술상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