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닥다리 레코드 상점을 떠올렸는데 아니었다. 지난달 2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오클랜드 브로드웨이가(街)에 있는 레코드 상점 '밴드캠프'에 들어서자 세련된 인디록 장르 음악이 크게 들렸다. 턴테이블에서 LP(Long Playing) 레코드가 돌아가고 있었다. LP는 먹색이 아닌 강렬한 주황빛이었다. 앨범 이름은 '텍사스 태양(Texas Sun)'. 넋을 놓고 보고 있자 점원이 다가왔다. "텍사스의 햇빛, 그 열기를 담은 LP입니다. 지난 11일 발매됐어요."

지난달 미국 오클랜드 레코드 상점 밴드캠프에서 강지원 탐험대원이 '하이 판타지(HIGH FANTASY)'라는 이름의 앨범 레코드를 들어 보이고 있다. 대부분의 뮤지션이 음악적 색채를 표현하기 위해 레코드를 직접 디자인한다.

음반 산업은 디지털 기술이 확산하면 빠르게 몰락하리라고 여겨져 왔다. 디지털 경제가 본격적으로 막을 올린 1990년대엔 불법 음원이 무분별하게 유통된 탓이다. 미국 최대 음반 가게인 타워레코드가 2006년 파산했을 땐, 이제 아무도 음반을 사지 않으리라는 극단적 비관론도 확산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약 15년이 흐른 지금, 음반 중에서도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LP가 부활하고 있단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처음엔 엉뚱한 얘기라 생각했다. 유명 가수 몇 명이 재미로 몇 장 찍은 게 전부 아닐까. 아이돌 가수로 활동한 적이 있는 뮤지컬 배우 지망생인 나는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대형 LP 매장이 문을 열었다는 미국 오클랜드로 향했다.

◇최신 LP 앨범 파는 미국의 음반 가게

음반 가게, 그것도 LP를 주로 파는 가게가 '신장개업'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겐 신선했다. 통계를 찾아보니 미국 내 LP 판매량은 실제로 가파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음악 판매량을 집계하는 '닐슨 사운드스캔'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내에서 팔린 LP 레코드는 1884만 장에 달했다. 집계가 시작된 1991년 이후 최다 판매량이자 전년 대비 14.5%가 늘어난 수치다.

오클랜드, 그리고 바로 옆 샌프란시스코에선 어렵지 않게 LP 매장을 만날 수 있었다. 우선 지난해 2월 문을 연 대형 음반 가게 밴드캠프에 들어섰다. 화려한 LP 재킷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한쪽 벽면은 알록달록한 표지의 LP 앨범 99장이 걸려 있었다. 모두 중고가 아닌, 최근에 새로 발매된 앨범이다. 헤비메탈·재즈·쿰비아(콜롬비아 민속 음악)·다크팝(슬픈 내면을 주로 표현하는 팝 음악)…. 장르만큼 음악가들의 국적도 뉴질랜드·미국·자메이카 등 다양했다.

오클랜드의 또 다른 LP 매장 '1-2-3-4 고! 레코드'에 들어서자 빌리 아일리시, 에미넘, 할시 같은 유명 가수의 최신 앨범이 보였다. 8년째 이곳에 근무하는 랍 플래처는 "요즘 유명 가수는 신보(新譜·새로 취입한 음반)를 낼 때 대부분 LP 버전을 함께 낸다. 한 달에 1000~ 2000장씩은 판다"고 했다. 이 LP 가게들을 찾는 손님은 모두 20~30대 젊은이였다.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 실리콘밸리 부근 청년들이 멋지게 차려입고 LP 선반 사이를 느리게 걸어 다녔다. DJ 출신 밴드캠프 직원인 미겔 레이에스씨는 "음반 구매자는 대부분 20~30대 젊은이들"이라며 "LP 부활을 이끄는 주인공은 중·장년이 아닌 밀레니얼(1980~2000년대 초 출생) 세대"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해 여론조사 회사 유거브(YouGov)가 18~24세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4명 중 1명이 과거 한 달 안에 LP를 산 적이 있다고 답할 정도로 젊은 세대에게 LP는 인기가 많다.

◇불편한 LP에 열광하는 젊은이들

젊은이들은 왜 관리가 어렵고 이동하며 들을 수도 없는, 이 불편한 LP 세상에 뛰어들려는 걸까. 현장의 젊은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음악을 만진다는 기분이 들어서 좋아. 디지털 음원에선 느낄 수 없는 실질감이랄까."(레이첼 존슨·30) "나는 집에 턴테이블도 없어. 그래도 좋아하는 가수의 LP를 사모으지. 좋아하는 뮤지션의 음악이라면 흘려듣기보다는 소장하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에마 리·20) "난 요즘의 일회성 소비문화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LP 닦는 시간 정도의 여유는 느끼고 싶어."(로건 클라크·27)

오클랜드 레코드 공장 '16㎑'에서 마이클 토머스씨가 이곳에서 만든 LP의 미니 버전 SP를 든 모습.

이들은 휘발해버리는 듯한 디지털 음악보단, '만지고, 느끼고, 가질 수 있는' 음악에 목마르다고 말했다. 음악가들에겐 반가운 소식이다.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보단 음반을 팔 때 아티스트에게 더 많은 돈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밴드캠프의 조시 김 최고운영책임자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음악을 들으면 매출의 6% 정도만 음악가에게 간다"며 "우리는 LP를 직접 제작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매출의 85~90% 정도를 아티스트에게 준다"고 했다. 매일 SP(한 음반에 2곡 정도를 담는 LP의 미니 버전)를 찍는 오클랜드 레코드 공장 '16㎑' 마이클 토머스씨는 "LP 붐은 독립 음악가가 설 자리를 더 만들어주는 반가운 트렌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