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창덕·윤승운·신문수·박수동 등과 함께 1970~80년대 대표적인 명랑만화가로 꼽혔던 이정문(79) 화백은 얼마 전 인터넷에서 '미래 예측자'로 새삼 이름을 떨친 적이 있다. 그가 그렸던 '서기 2000년대의 생활의 이모저모'란 만화 때문이었다.

만화 속 내용은 이랬다. '전기자동차, 전자신문, 로봇 청소기, 태양열을 이용한 집, 움직이는 도로가 일상화될 것이다. 모니터를 통해 집에서 치료를 받고 수업도 들으며, 소형 TV 전화기를 손으로 들고 다니며 통화하게 될 것이다.'

한국 SF 만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철인 캉타우'의 복간을 앞둔 이정문 화백이 경기 이천의 작업실 안 캉타우 모형 앞에서 로봇 주인공의 포즈를 흉내 내고 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이 만화가 1965년 한 학생잡지에 실렸다는 사실 때문이다. "반세기 이후의 세상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예측했느냐"는 찬탄이 쏟아졌다.

온갖 만화 원고와 피겨로 가득 차 만화박물관을 방불케 하는 경기 이천의 작업실에서 이 화백을 만났다. 그는 "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신문을 열심히 읽으니 그렇게 되더라"며 웃었다. 5·16 이후 군인들이 무전기로 교신하는 걸 보고 '더 작은 통신기기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고, 태양열발전 기사를 보고서 상상력을 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땐 '예끼 이 사람, 아무리 만화지만 뭐 이렇게 황당무계한 공상을 하고 있느냐'는 말도 들었죠."

'이정문 상상력'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SF 만화 '철인 캉타우'(1976)가 올 상반기 복간될 예정이다. 이젠 성인이 된 옛 어린이 팬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 '클로버문고의 향수' 지원으로 이뤄지는 이번 복간은 잡지 연재 시절의 원고를 복원하고 새 원고를 추가한 '캉타우 완전판'이 된다. 아텀과 마징가제트 같은 일본 로봇들이 판을 치던 40여년 전, 그 혼자서 '깡'으로 그려낸 토종 로봇이 캉타우였다.

6·25전쟁을 겪고 구두닦이를 하던 소년 이정문에겐 척박한 전후(戰後)의 폐허가 상상력의 밑거름이었다. 그는 구두를 닦으면서도 광활한 우주를 떠올렸다. 툭하면 '넌 시로도(초짜)가 그게 뭐냐'며 갑질을 일삼던 진상 손님을 상상 속에서 골탕 먹이는 과정에선 '심똘이' '심술통' 같은 명랑만화의 심술 캐릭터가 탄생했다. "내 심술 시리즈 속 주인공들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응징을 펼치는 역할을 했지요."

명랑만화와 함께 이정문 만화의 두 축을 이루는 장르가 SF였다. 그 첫 작품이 소설가 성석제가 '알파칸을 읽으려고 한글을 깨쳤다'고 회고한 '설인 알파칸'이었고, 그걸 계승한 작품이 '철인 캉타우'였다. "사실 그 이름은 우리말 '깡다구'에서 따온 거였어요. 아이들이 죄다 일본 만화 마징가만 보는 게 너무 속상해서, 나라도 우리 로봇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거죠."

항생제 알약을 본뜬 뭉툭한 체형의 캉타우는 왼손에 전통 무기인 철퇴를 달고 있는 '한국적' 외모였다. 적 로봇과는 광활한 바다에서 역동감 넘치는 격투를 벌여 어린이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악당이 죽으며 '지구를 살려야 한다'고 절규하는 장면도 독특한데, 그는 "환경보호가 향후 화두가 될 것으로 짐작해 메시지를 넣은 것"이라고 했다. 하이라이트는 '가짜 마징가'가 등장해 캉타우에게 묵사발이 되는 장면이었다. 캉타우는 최근 후배 작가에 의해 웹툰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캉타우 2부의 작업을 얼마 전 시작했다는 이 화백은 "이번 복간본에 들어갈 것"이라며 최근 전지에 새로 그린 캉타우의 컬러 격투 장면 15점을 보여 줬다. 로봇 그림을 손에 든 팔순 만화가의 표정이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