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방침에 따라 금융 공공기관이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금융권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금융노조는 직무급 도입에 반발하고, 노사 합의로 직무급제 도입을 결정할 수 있는 민간 금융회사는 금융 공공기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융업은 국내 주요 산업 중 호봉제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라 직무급제 도입이 확산되면 가장 큰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금융노조 출범 첫 날에 "직무급제 저지"

지난 6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는 금융노조 정기전국대의원대회가 열렸다. 작년 12월 임원선거에서 당선된 새 집행부의 취임식도 함께 진행됐다. 이날 새로 취임한 금융노조 집행부는 2020년 주요 사업계획 중 하나로 직무급제 강제도입 저지를 내세웠다.

같은날 방문규 수출입은행장은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직무급제를 도입한 기관이 어느 수준에서 제도를 도입했는지 스터디하고 있다"고 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금융권의 직무급제 도입 논란에 다시 불을 붙인 격이었다. 이에 수출입은행 노조는 사측에 강하게 항의했다.

금융노조도 올해 주요 사업계획에 직무급제 도입 저지를 포함하며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결국 취임식이 끝나고 방 행장이 금융노조 위원장을 찾아가 노조 협의 없이 직무급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했다.

직무급제는 업무의 난이도와 책임에 따라 급여를 다르게 책정하는 제도다. 업무의 난이도에 따라 급여와 성과의 보상이 달라지기 때문에 힘든 일을 맡은 사람에게 더 확실한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대부분의 금융회사가 도입한 호봉제는 근속 기간에 따라 직위가 오르고 연봉도 일정 비율로 인상된다. 맡은 업무에 상관없이 자리만 지키면 매년 급여가 오르기 때문에 성과와 보상이 일치하지 않는다. 직무급제는 한동안 금융권이 도입을 검토하던 성과연봉제와 차이가 있다. 직무급제는 임금 차등의 기준이 업무의 성격과 난이도인데 비해 성과연봉제는 성과만을 본다.

직무급제와 관련한 정부의 입장은 확실하다. 저성장 구조와 인구 고령화 시대를 맞아 호봉제를 직무급제 중심으로 전환하는 게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혁신 과제 중 하나인 임금체계 개편의 핵심 방안이 직무급제 도입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달 '직무·능력 중심 임금체계 확산 지원 방향'을 발표하면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직무급제 도입 지원을 늘리겠다고 했다.

정부의 방침이 확실한 만큼 금융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전선이 형성되는 모습이다. 방 행장이 직무급제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이 나오자 노조 차원에서 거세게 반발한 수출입은행뿐 아니라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 다른 금융 공공기관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산업은행 노조는 지난달말 "직무급제 도입을 저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조윤승 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직무급제는 성과연봉제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는 내로남불식 정책"이라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노조의 반대로 한 달 가까이 본점에 출근을 하지 못했던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노조가 동의하지 않으면 직무급제를 도입하지 않겠다고 이미 약속까지 했다. 한국수력원자력, 코트라 등 대형 공공기관이 잇따라 직무급제 도입을 선언하고 있는데 금융 공공기관에서는 도입이 요원한 상태다.

민간 금융회사도 상황은 비슷하다. 교보생명이 올해부터 직무급제를 시행한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민간 금융회사가 과거의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면 직군에 따라 업무의 난이도와 책임을 모두 계량화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작업"이라며 "금융 공공기관의 도입 상황을 보고 시범적으로 도입하는 게 현실적인 방법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 안 하는 억대 연봉자 수두룩

금융업은 국내 주요 산업 중 호봉제를 유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편이다. 2019년 기준으로 금융업의 호봉제 도입 비율을 67.5%에 달하는데 다른 주요 업종은 대부분 50% 밑으로 낮아진 상태다. 대부분의 산업이 업무의 성과와 난이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연공서열을 깨고 있는데, 금융업만 나홀로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다.

어려운 일을 맡거나 성과를 내지 않아도 자리만 지키면 연봉이 차곡차곡 늘어나다보니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에는 만년 대리, 만년 과장이 넘쳐난다. 굳이 승진을 하거나 중요 보직을 맡지 않아도 억대 연봉을 받을 수 있다보니 승진을 포기하고 은행에서 쉬다가 퇴근하는 직원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은행의 억대 연봉자 비율은 2018년 기준으로 30%에 달한다. 시중은행은 희망퇴직제도를 활용해 고연봉 잉여 인력을 어떻게든 내보내기라도 하지만 금융 공공기관은 명예퇴직제도가 유명무실하다보니 인력 관리에 더 큰 어려움을 겪는다.

한 금융 공공기관장은 "직무급제 도입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는 반드시 가야 할 길"이라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이해관계자가 다양하게 얽혀 있다보니 해결이 요원하다"고 말했다.

대규모 공채가 사라지고 52시간제 같은 새로운 근무 환경이 도입된 가운데 임금체계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중은행 인사담당자는 "대규모 공채 시절에는 순환근무가 일상이었기에 호봉제가 적합한 임금체계였지만, 직무·경력 위주의 수시 채용 문화가 확산되면서 호봉제로는 좋은 인재를 영입하고 유지하는게 어려워졌다"며 "평생 직장 개념도 사라진 마당에 오래 버티면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호봉제보다 당장의 업무와 성과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는 직무급제, 성과연봉제에 대한 선호도 젊은 직원들 위주로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