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적해서 나온 거야. 북적이는 공항에 앉아있으면 시간이 훅 가니까. 애들(자녀들)은 이번 설에도 일하느라 바쁘대."
설 연휴 첫날인 24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최계식(88)씨는 "오전 6시에 집을 나서 공항철도를 타고 1시간 30분 걸려 인천공항에 왔다"고 했다. 손에는 경제신문이 들려 있었다. "멍하니 앉아있기 민망해서 들고나왔다"고 했다. "명절인데 자녀분들은 어디 두고 오셨느냐"는 질문에는 "살기 바쁘니 오라 하기도 미안하고…"라며 멋쩍게 웃었다.
이날 인천공항은 연휴 기간을 맞아 해외로 출국하는 여행객으로 오전부터 붐볐다. 형형색색 캐리어를 끌고 출국장을 향하는 여행객들 사이로 단출한 차림의 어르신들이 보였다. 명절에 갈 곳 없는 독거노인들이다.
인천공항 터미널은 명절마다 독거노인의 쉼터로 변한다. "집에서 쓸쓸하게 보내기보단 편의시설도 잘 돼 있고, 사람 구경도 할 수 있는 공항이 좋다"고 말한다. 이들은 주로 제2 여객터미널 지하 1층 교통센터 앞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거나, 볕이 잘 드는 1층 쇼윈도우 앞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한다.
◇명절마다 노인들의 놀이터 되는 공항…"볼거리·먹거리·놀거리 한곳에서 해결 가능해"
인천공항을 찾는 노인들은 특히 제2 여객터미널이 증설되며 대폭 늘었다. 팔걸이가 없어 몸을 누울 수 있는 의자가 많고, 오래 머물러도 간섭받지 않는 환경 때문이다. 실내 온도도 항상 18도 내외로 유지돼 "겨울철에 머물기 딱 좋다"고 한다.
24일 공항철도에 따르면 2018년 1월 제2 여객터미널이 개장을 기점으로 설 연휴에 공항을 찾은 65세 이상 이용객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2018년 당시 설 연휴 나흘간 하루 평균 노인 하차객은 1123명으로, 개장 직전인 2017년 연휴 기간 하루 평균 744명이 공항을 찾았던 것과 비교해 2배가량 늘어난 것이다.
인천공항은 설 연휴 기간 동안 전통공연, 인간문화재 공연, 전통소품 만들기 체험 등을 진행한다. 어르신들의 놀이터가 되는 셈이다. 서울 마포구에서 온 김모(76)씨는 "설날에는 가게들도 다 문을 닫아 꼼짝없이 집에서만 보내야 하는데, 공항에 오면 종일 해주는 공연도 보고 비행기 구경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른다"고 말했다. 인천공항 관계자는 "여객터미널 1층에서 하는 공연에 특히 어르신들이 더 많이 찾아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처지를 나누는 노인들이 모여 터미널은 금세 ‘사랑방’이 된다. 텔레비전 앞 의자에 앉은 김유임(66)씨는 "명절에 찾아오는 아들 하나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있다 보니 가족 같다"고 했다. 바로 옆 류만헌(69)씨는 "텔레비전에서 무슨 방송을 하는지는 별 관심이 없다. 집에서 보나 공항에서 보나 마찬가지니까. 다만 여기는 다른 사람들과 볼 수 있고, 얘기도 나눌 수 있어서 그점이 다르다"고 했다. 그 시각 텔레비전에선 ‘UFC 코너 맥그리거 명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연휴 첫날에만 22만명 찾은 인천공항, "이해는 가지만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인천국제공항공사에 따르면 이번 설 연휴에 103만9144명이 공항을 찾을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보다 2.8% 증가한 수치다. 인천공항측은 설 연휴 동안 하루 평균 20만7829명이 공항을 이용하고, 이 가운데 첫날인 24일 가장 많은 22만3157명이 공항에 올 것으로 예측했다.
공항 측과 이용객들 입장에서 노인들은 결코 반가운 손님은 아니다. 공항의 한정된 자리 특성상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2 여객터미널 1층과 지하 1층의 경우 오전부터 한자리에서 3~4시간 동안 떠나지 않고 의자에 누워 잠을 청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떠나는 정모(29)씨는 "새로 생긴 터미널 구경을 하러 한두시간 정도 일찍 왔는데 생각보다 주무시는 어르신들이 많아 서울역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냥 일찍 체크인해서 면세점 구경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들이 한 자리서 먹고 놀며 생긴 쓰레기 처리가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인천공항의 한 환경미화원은 "어르신들이 집에서 가져오신 김밥이나 빵, 우유 등을 먹고 그자리에 그대로 버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아 청소가 더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이들이 앉아있던 의자 주변에는 빵 부스러기와 휴지 등이 떨어져 어지럽혀 있었다.
인천공항 관계자는 "노인분들이 하루에 얼마나 오시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점심즈음에 많이 오셔서 적어도 3~4시간은 있다 가신다"며 "특히 교통센터 1층에 편하게 쉴 공간이 많아 돗자리를 가져오시고 바닥에 눕는 분도 있다"고 했다.
이런 불만을 노인들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쓸쓸한 명절을 이해해달라"고 하소연했다. 김모(71)씨는 "우리로선 공항이 갈 수 있는 가장 먼 여행지"라며 "즐거운 표정의 여행객들을 보며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 조용히 있다 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