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문재인 대통령은 열광적 지지자들에게 철인왕(philosopher king) 같은 존재다. 철인왕은 절대 진리에 대한 인식과 함께 진리를 실현할 권력을 갖춘 지도자다. 한국적 맥락에서 철인왕은 민족과 국가가 가야 할 길을 아는 인물이다. '모두가 함께 잘 사는 나라다운 나라'를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이다. 문재인 정권의 질주(疾走)는 이런 대중적 지지 위에서 가능했다. 문 정권의 정국 주도권이 견고한 이유다. 신년기자회견에서 보듯 문 대통령 자신도 철인왕의 사명감이 가득하다.

내치와 외치가 엉망이건만 '철인왕 문재인'의 길은 항상 옳다고 믿는 대중이 이른바 문빠다. 영웅을 경배하는 정치적 팬덤 현상이다. 진리와 공공선에 헌신하는 철인왕은 무(無)오류이며 사심(私心)이 없다고 이들은 확신한다. 철인왕이 총체적 실정(失政)을 거듭해도 그건 철인왕의 실수가 아니라 현실이 잘못된 것이라 여긴다. 문재인 정권에서 소득 주도 성장, 탈원전, 대북 굴종 정책이 성역화한 배경이다. 이들은 문 대통령을 '불의가 승리한 한국 현대사'를 갈아엎는 정의의 사도로 숭배한다. 선(善)의 상징인 지도자를 수호해 악의 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흑백논리다. 조국 사태에서 검찰 사태에 이르기까지 문빠들의 일관된 태도다.

하지만 철인왕과 이상 국가의 꿈은 거대한 망상에 불과하다.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꼬인 현실을 단칼에 풀 정치적 진리가 있을 리 없다. 철인정치는 민주정치와 양립 불가능하다. 선악의 적대 정치에 의존하는 철인 통치가 다원 민주주의와 정면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철인정치는 정치를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재단한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른다는 철인 통치가 흉포한 독재로 귀결되는 이유다. 이에 비해 민주정치에선 삶의 현안을 타협과 시행착오를 거쳐 해결해가는 국가 운영과 통치력이 핵심이다. 비장한 문재인식(式) 철인정치는 말만 화려할 뿐 민생과 외교안보 같은 국가 운영에선 한없이 무능하다. 철인정치의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의 악몽을 부른다. 문 정권의 독단과 한국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 그 증거다.

집권 3년 차 문재인 정권은 철인왕의 유사(類似) 군주정으로 폭주 중이다. 대통령 권력의 초(超)비대화가 삼권분립을 무너트린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대통령 입맛에 맞게 바꾸고 내각과 여당은 청와대 출장소로 전락했다. 언론 지형도 압도적으로 정권에 기운 지 오래다. 법원과 검찰을 공수처로 옥죄고 공룡 경찰로 시민사회의 일상을 통제하는 경찰국가가 멀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건 입법부다. 선거법과 공수처법을 분탕질한 범여(汎與) 1+4 담합 신기(神技)는 총선 이후 현실화할 국회 기능 해체의 전조(前兆)다.

문 정권은 합법성의 겉모습을 꾸며 삼권분립과 법치주의를 유린했다. 문 대통령은 합법적 수단으로 정치 게임의 규칙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꿨다. 정부·여당의 선거 패배 가능성을 막는 장치인 선거법 개정과 공수처 도입, 경찰 권력 확대가 생생한 증거다. '정부·여당이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다'라는 교훈을 거역하는 문 정권의 행보는 반(反)민주주의 그 자체다. 우리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이 합법적 제도를 악용해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경악스러운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문 정권의 민주주의 훼손을 떠받친 최대 원군(援軍)이 친(親)정권적 시민사회라는 사실이 놀랍다. 시민사회는 정부와 자본에서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문 정권 들어 일부 진보시민단체는 정권과 일체화했다. 이들은 정의로운 문 정권을 지킨다는 도덕근본주의적 철인정치를 맹종(盲從)한다. 정치는 적과 동지의 생사 투쟁이라는 믿음으로 정권을 결사 옹위한 어용 진보 지식인들의 득세는 시민사회의 재앙이다.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고 공론장을 왜곡해 민주주의에 치명타를 가했다.

'철인왕 문재인'의 신(新)권위주의적 포퓰리즘 통치가 기승을 부린다. 정권발(發) 가짜 뉴스와 어용 지식인들의 선동이 시민적 상식을 유린하고 정의를 능멸한다. 직접민주주의를 빙자한 다수의 전제(專制)와 철인왕의 시대착오적 결합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독재자가 민주주의를 생사의 위기에 빠트리고 있다. 하지만 국민적 환멸과 무력감은 정부·여당의 장기 집권 음모를 도울 뿐이다. 이번 총선은 나라의 명운을 결정할 정초(定礎) 선거다. 피와 눈물의 한국 민주주의가 절규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