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국현

'일본 군마의 발굽에 함부로 짓밟힌 조선 민중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일본 군인을 두려워하였고 총과 칼을 두려워하였다. (중략)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만 보아도 "아이고 왜놈" 하고 달아난다. (중략) 그동안에 일본 사람이 총과 칼로써 조선 민족을 쓸어 죽이려 한 것은 밝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라.'(조선일보 1920년 6월 9일 자)

조선일보는 1920년 6월 1일부터 10회 연재한 기사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에서 '왜놈'이란 표현까지 쓰며 일제 통치를 강하게 규탄했다. 1년 전 3·1운동 탄압의 잔학성을 폭로한 이 연재 기사는 '하고(何故)로 철저하게 죽이려고만' '그것이 조선 통치의 정신이냐' '골수에 심각(深刻)된 대혈한(大血恨)의 진수(眞髓)' 등 일제가 섬뜩해할 정도의 격문 같은 제목을 달았다.

이 연재 기사는 '창간 기자' 방한민(1900~?)과 최국현(1899~1970)이 번갈아 썼다. 충남 강경 출신으로 수원농업학교에서 수학한 방한민은 3월 조선일보 입사 이후 주로 독립운동 관련 취재를 맡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유광렬은 "조선일보의 외근 기자로는 방한민이 있어 독립운동 관계 취재에서 자주 특종을 내며 동아의 본인과 치열한 스쿠프(특종) 경쟁을 했다"면서 "조선일보가 동아보다 앞서 발행정지를 당한 것도 그가 쓴 기사가 많은 작용을 하였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는 8월 27일 민간지 최초로 정간을 당한다. 방한민이 쓴 '자연(自然)의 화(化)'라는 논설 때문이었다. 당시 방한한 미국 의원단을 환영하는 조선인들을 일제 경찰이 부당하게 탄압했다고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1주일 후 정간이 풀리자 조선일보는 9월 5일 자에서 '우열(愚劣)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논설을 실어 다시 정간 조치를 받았다. "조선일보라는 간판 아래에서 민족적 양심이 민멸(泯滅)되지 않는 한 우리는 철두철미 배일(排日) 신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엔 무기 정간이었다. 속간호는 12월 2일 나왔다. 조선일보는 창간 첫해부터 강한 항일 논조로 '총독부를 경악시키는 신문'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조선일보 창간 기자 방한민은 총독 폭살 미수, 치안법 위반 등으로 두 차례 투옥돼 약 13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왼쪽은 일제가 1930년 만든 방한민의 수형 카드, 오른쪽은 방한민이 최국현과 함께 집필한 연재 기사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1920년 6월 9일 자.

방한민은 1923년 북간도 용정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해 일제가 대성학교를 폐교시키자 사회주의 교육기관인 동양학원을 설립했다. 그는 동양학원 동지들과 함께 용정 근처 철도 개통식에 참석하는 총독을 암살하려는 거사를 계획했지만 사전에 발각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1923년 7월부터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다시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다가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돼 다시 8년간 수감 생활을 했다. 오랜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였던 그는 6·25전쟁 중 실종됐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고, 2010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서울 경신학교 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에서 수학했던 최국현은 1920년 5월 조선일보에 합류했다. 8월 논설 '자연의 화'로 조선일보가 정간당하자 방한민과 함께 회사를 떠났다가 다시 입사했다. 그는 일제가 잡지 '신천지'와 '신생활' 기사를 문제 삼아 관련자를 구속하자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협동 노력한다"는 선언문에 조선일보 대표로 서명하기도 했다. 선언문에는 송진우(동아일보) 염상섭(동명) 이재현(개벽) 김원벽(신생활) 오상은(신천지) 등이 서명했다.

1923년 사회부장을 지냈으나 1925년 9월 28일 사설 '조선과 노국(러시아)과의 정치적 관계'로 조선일보가 다시 정간을 당한 후 퇴사해야 했다. 해방 후 반민특위 특별재판관 15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고, 제헌 의원과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