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패션 잡지 신년호 화보 부문 대상이 있다면?
웹툰 작가 '기안84(본명 김희민·36)'의 수상이 유력하다.
그가 스타일리스트 한혜연과 함께 촬영한 잡지 '데이즈드 코리아'는 지난달 한 방송사 프로그램에 나가자마자 온라인 사이트는 다운되고 잡지는 일부 매장에서 품절됐다. 극심한 불황을 겪는 종이 잡지 시장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그가 입은 옷도 마찬가지다. 명품 브랜드 구찌와 디올, 프라다의 코트, 디자이너 우영미의 셔츠와 팬츠, 발리의 파란색 판초, 포트레이트 리포트의 이어커프(귀찌), 펜디의 지퍼 디테일 니트 등은 매장마다 문의가 폭주하거나 일부 품절됐다. 한때 온라인 쇼핑몰 11번가에서도 실시간 쇼핑 검색어 1위에 올랐다. 완판남 '기안84'의 탄생이다.
그렇다면 외국 최고의 남성 패셔니스타는? 공식 수치가 있다. 남성 잡지 GQ 영국판이 지난 4일 발표한 '베스트드레서 남자 부문(best-dressed men of 2020)' 1위는 영화배우 티모테 샬라메였다. 지난 23일 미국판이 발표한 '이 주의 베스트드레서(The 10 Best-Dressed Men of the Week)'도 역시 샬라메가 차지했다.
기안84는 이전 완판남들과 다르다. 지드래곤처럼 트렌드에 민감하지 않고, 공유처럼 뭘 입혀놔도 옷이 '공유발'을 받는 외모가 아니며, 강다니엘처럼 젊음과 강한 팬덤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아 챙겨줘야 할 것 같은 사고뭉치 남동생 이미지가 강하다.
샬라메도 마찬가지다. 꽤 이쁘장한 얼굴이지만 그걸 함부로 다루기로 유명하다. 평소엔 부스스한 머리에 목이 늘어난 티셔츠, 헐렁한 추리닝 바지를 허리 밑으로 내려 입고 다닌다. 베를린 국제 영화제 공식 행사에도 꽃무늬 패딩과 추리닝 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과거 완판남들과 사뭇 다른 이들이 왜 '2020 첫 완판남'이 된 것일까.
접근 가능한 '남친룩'
이제 다들 안다. 내가 공유의 도깨비 코트를 입는다고 공유가 되지 않는다는 걸. 그러나 '기안84'는 다르다. 그가 평소 보여준 '귀차니스트(만사를 귀찮아하는 사람)' 복학생 이미지도 열심히 운동하고 꾸민다면 한순간에 '국민 훈남'이 될 수 있다는 접근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때문인지 각종 다이어트 커뮤니티마다 "기안84의 변화한 몸을 보고 바로 헬스장에 등록했다"는 '간증'도 이어진다.
작년 겨울 배우 류준열이 입은 패딩과 가방이 완판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는 조각 미남이나 꽃미남은 아니다. 전형적 미남이 아니기에 표정이나 연기를 통해 다양한 모습을 표현할 수 있고, '응답하라 1988'에서 보여준 것처럼 옆집 친구와 같은 친근한 분위기를 풍긴다. 추구하는 패션도 전형적인 '남친룩'이다. 남친룩은 '내 남자 친구가 입어주면 좋을 것 같은 스타일'이란 뜻으로 안 꾸민 듯하지만 멋진 옷차림을 가리킨다. 누구나 한 번쯤 따라 해볼 만하다는 것이다. 샬라메도 마찬가지다. 영화배우 조니 뎁의 딸 릴리 로즈 뎁의 남자 친구로 알려진 그는 늘 캐주얼하지만 감각 있는 옷차림이다. GQ 영국은 "그는 레드카펫에서조차 격식을 벗어던진 편안한 스타일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성공한 '동경의 대상'
아무리 옆집 대학생 오빠처럼 친근한 매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완판남이 되려면 '동경'이 빠져서는 안 된다. TV에 나오는 모습은 어리숙해 보이지만 그는 성공한 웹툰 작가이자, 엔터테인먼트 회사에 소속된 예능인이고, 한 회사 대표이기도 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아크테릭스의 '파이어비 AR파카', 언더아머 티셔츠, 소프트립스 립밤 등이 완판되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다. 올해 겨우 스물네 살인 샬라메도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흥행 성공시키고 런던비평가협회 남우 주연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남우 주연상 등을 받는 등 연기력도 인정받았다.
특히 명품 협찬 기준은 까다롭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협찬 대상은 이미지가 고급스럽고 외모가 뛰어날 뿐 아니라 누구나 닮고 싶은 선망 대상이어야 한다"며 "아이돌은 톱급이어야 하고, 영화배우나 탤런트는 주연급만 협찬한다. 패셔니스타로 유명했던 모 배우는 뛰어난 외모와 달리 주연을 한 번도 맡지 못해 명품 협찬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