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참회록' 일부)

암울한 일제 말기를 버티며 참회와 희망의 시편을 쏟아낸 문학청년 윤동주(1917~1945). 스물한 살 시인의 감성과 지성을 일깨운 것은 조선일보 학예면이었다.

연희전문 졸업앨범 속 윤동주(가운데). 윤 시인이 1938년 4월부터 10개월간 스크랩한 조선일보 학예면에는 문학·철학·역사·어학 등 당대 최고의 문인과 학자들이 글을 실었다.

1938년 봄 용정 고향 집을 떠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한 윤동주는 낯설고 물선 경성의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학교 밖은 더 황량했다. 이태 전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 이후 총독부는 조선인 입을 가혹하게 틀어막았다. 당국에 비타협적인 민간 한글 신문이 주요 표적이었다. '지면 쇄신 요항' '검열 기준' 등 갖가지 명목으로 옥죄기 시작했다. 일제가 1937년 7월 중국 침략 전쟁에 나서자 '일본군'을 '아군'(我軍) 또는 '황군'(皇軍)으로 쓰도록 강요했다. 1938년 새해 첫날 각 신문 1면은 일왕 부부 사진과 미나미 총독, 조선군 사령관 담화로 도배했다. 어두운 시절이었다.

이틀에 한 건꼴로 스크랩하며 애독

조선일보는 민족의 말과 역사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신문을 계속 발간했다. 그런 생각을 헤아린 청년과 지식인들은 한 가닥 아쉬움 속에서도 신문을 애독했다. 2001년 8월 15일 본지에 공개된 윤동주의 조선일보 스크랩북은 민족의식 강한 청년이 당시 신문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보여준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신입생이던 1938~1939년 조선일보 학예면을 매일 읽고 기사를 오려 붙이며 문학과 세상에 대한 안목을 키워갔다.

윤동주가 연희전문 신입생 시절 조선일보 학예면 기사를 오려붙인 스크랩북.

남아 있는 윤동주의 조선일보 스크랩북은 3권이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4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10개월 동안 조선일보 학예(學藝) 기사 144건을 정성스레 오려 붙였다. 1938년 4월 19~21일치에 실린 철학자 박종홍의 '현대 철학의 제문제'부터 1939년 2월 14일치에 실린 시인 백석의 '시인 산문-입춘(立春)'까지다. 이틀에 한 건꼴이다. 조선일보 학예면은 당대 최고 문인·학자들이 만들었다. 첫 스크랩 기사가 실린 1938년 4월 19일 하루치만 봐도 그렇다. 채만식의 '탁류', 박태원의 '우맹'(愚氓) 등 연재소설과 함께 문학평론가 김남천, 소설가 이태준의 글이 실렸다. 마지막 기사인 1939년 2월 14일 자엔 시인 백석의 산문 '입춘', 벽초 홍명희의 대표작 '임꺽정', 박태원의 '우맹'과 함께 국문학자 이병기, 문학평론가 서인식의 글이 실렸다. 하루치 신문에 당대 지성들이 앞다퉈 글을 실었다.

역사·철학·영화·음악까지 관심 넓혀

윤동주가 스크랩한 조선일보 학예면 기사는 문학과 어학, 철학, 역사 등 창작과 직간접 관련이 있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문학평론가 최재서의 '현대 세계 문학의 동향'(상·중·하, 1938년 4월 22~24일), 문학평론가 겸 조선일보 기자 이원조의 '9월 창작평'(1938년 9월 7~9일), 소설가 김남천의 '11월 창작평'(1938년 11월 9~13일), 시인 임화의 '대지의 세계성-노벨상 작가 팔빡에 대하야'(1938년 11월 17~20일) 등이다. 소설가 채만식과 극작가 유치진의 치열한 논쟁도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채만식이 쓴 '문학과 영화-그 실천인 도생록 평'(전 4회·1938년 6월 16~21일)과 유치진의 '영화 옹호의 변-채만식씨에게 보내는 글'(전 3회·1938년 6월 25~30일)을 잇따라 수록했다. 국어학자 이희승, 국문학자 양주동, 소설가 홍명희의 문학·어학 연구 분야 글도 실었다. 윤동주의 지적 호기심은 조선일보 논설 고문 겸 역사학자 문일평, 민속학자 송석하는 물론 박치우·안호상·신남철 같은 당대 최고 철학자 글도 놓치지 않을 만큼 폭넓었다. 음악평론가 겸 클라리넷 연주자 김관의 '음악적 교양 논의-음악적 취미와 사회적 관심'(1938년 10월 17~30일)도 눈에 띈다.

좌우, 신인, 원로 망라한 일급 필진

윤동주가 스크랩한 조선일보 학예면 필진은 좌우를 아울렀고 신춘문예를 막 통과한 신인부터 중진·원로까지 고루 포함됐다. 앞서 든 필자 외에 한설야 이기영 안함광 안회남 박영희 이여성 유자후 전몽수 유진오 백철 신석초 모윤숙 김광섭 함대훈 윤곤강 정인섭 김영수 정비석 김태준 김오성 등 문학 철학 국어학 민속학 역사학 등 당대 일급 지식인이 총망라됐다.

스크랩북 마지막 기사(1939년 2월 14일)는 윤동주가 사랑한 시인 백석의 산문 '입춘'이었다. '입춘만 들면 한 겨울내 친했던 창에(덫)와 설매(썰매)와 발구(큰 썰매)며 꿩 노루 토끼에 멧돼지며 매 멧새 출출이(뱁새)들과 떠나는 것이 섭섭해서 소년의 마음은 흐리엇던 것이다.' 평북 정주 출신 백석의 글을 읽으며 윤동주는 고향의 겨울 풍경을 떠올렸을 것이다. 백석은 1936년 1월 당시 몸담고 있던 조선일보의 자매사 선광에서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냈다. 시집을 구할 수 없었던 윤동주는 시집을 빌려 손으로 베껴 간직할 만큼 백석을 흠모했다고 한다.

연희전문 3학년 때 조선·동아 폐간

윤동주가 연희전문 3학년에 다니던 1940년 8월 10일 조선·동아일보는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이듬해 연희전문을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일본 유학을 떠났다. 도쿄 릿쿄(立敎)대학에 이어 교토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다니던 윤동주는 1943년 7월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해방을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스물여덟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해방된 지 2년 반 만인 1948년 1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왔다.

윤동주의 스크랩북이 공개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여 년이 지나서였다. 2001년 중국 용정 심호수씨 집에 보관돼 있던 걸 윤 시인 매제 고 오형범 장로(2015년 작고)가 사본을 입수해 윤인석(윤 시인 조카)성균관대교수에게 전달했고, 윤교수가 본지에 공개했다. 천만다행으로 1949년 공산혁명과 1960년대 문화혁명의 광풍(狂風)도 비켜 갔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서시' 일부) 부끄럼 없는 삶을 갈구하던 윤동주의 손때 묻은 스크랩북은 이렇게 살아남았다.

[수필 '달을 쏘다' 등 조선일보에 투고]

조선일보 1939년 1월 23일 자 학생면에 실린 윤동주 수필 '달을 쏘다'.

윤동주는 조선일보 애독자이면서 기고가이기도 했다. 연희전문 시절 그는 조선일보 학생 페이지에 시 '아우의 인상화'와 '유언', 수필 '달을 쏘다'를 실었다. 당시 연희전문 문과의 청년들은 조선일보 학생 페이지에 투고하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아우의 인상화' 일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뒤 처음 맞은 여름방학에 고향 집에 다니러 왔을 때 동생과의 만남을 담은 작품이다. 이 동생은 윤동주와 열살 터울인 남동생 윤일주(1927~1985) 전 성균관대 교수다.

윤 시인은 열살 갓 넘은 동생에게 태극기와 무궁화, 애국가와 3·1운동, 광주학생의거 얘기를 들려줬다. 대학시절 조선일보가 내는 월간지 '소년'을 우편으로 꼬박꼬박 보내줄 만큼 다감한 형이었다. 용정 집에선 '소년'이 오기만 하면 서로 먼저 보려고 다툴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윤동주는 '소년'(1939년3월호)에도 '산울림'이란 동시를 발표했다. '까치가 울어서 산울림/아무도 못들은 산울림/까치가 들었다 산울림/저혼자 들었다 산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