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열린 삼성전자의 개발자대회. 참가 등록 부스에 놓인 4종류의 동그란 스티커에는 각각 He(그), She(그녀), They(그들), Zie(제3의 중성 대명사)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게이(남성 동성애자)나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과 같은 성소수자들은 He, She 대신 They, Zie처럼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대명사로 불리길 원한다. 삼성이 스티커를 통해 이를 지지한다는 뜻을 표시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본인이 원하는 스티커 하나를 집어 출입증의 이름 옆에 붙이면 된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자연스럽게 나의 성적(性的) 지향, 희망 호칭을 알아차리도록 한 것이다.
지난 9월에 열린 페이스북의 가상현실(VR) 개발자 행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참가자들에게 4종류의 호칭이 적힌 배지(badge)를 나눠줬고, '남성·여성·중성' 표지가 한꺼번에 붙은 성평등 화장실을 운영했다〈사진〉. 이 화장실 입구에는 바지 입은 남성, 치마 입은 여성, 바지와 치마를 반반씩 입은 사람의 기호가 모두 그려져 있다. 특정 성별의 화장실 이용이 불편한 성소수자들을 위한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성소수자를 뜻하는 'LGBTQ(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성전환자 등)'가 대세가 되고 있다.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고 상대방도 이를 쿨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이곳의 기본 정서다. 실리콘밸리가 위치한 캘리포니아주의 진보 성향이 강한 이유도 있지만, 애플·구글·페이스북과 같은 주요 테크 기업 역시 이런 문화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지난 2014년 "내가 게이인 것이 자랑스럽다"고 선언한 애플의 장수 CEO(최고경영자) 팀 쿡이 대표적이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성소수자 비율은 6.2%로 미국에서 가장 높다. 미국 평균은 3.6%다. 팰로앨토의 한 벤처기업 임원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아시안, 게이 빼면 아무도 안 남는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라고 했다. '많다'는 것은 곧 '드러낼 수 있다'는 뜻이다.
주요 테크 기업들의 이런 행보는 핵심 타깃인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를 겨냥한 것이기도 하다. 밀레니얼은 성평등, 다양성·포용과 같은 가치를 중시한다. 삼성전자가 올 2월 공개한 갤럭시 홍보 영상에 임신한 레즈비언 부부를 등장시킨 것도 이 같은 계산이 깔려 있다. 최근 수년간 기업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는 직책은 최고다양성책임자(CDO·Chief Diversity Officer)다. 직원 채용부터 사내 문화,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성별과 인종 등 다양한 배경, 가치관을 회사에 녹여내는 역할이다.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는 창업 9년 만인 지난해 한국계 이보영씨를 첫 CDO로 임명했다.
동영상 서비스 유튜브는 지난 11일(현지 시각) 성적 지향과 성별·인종을 이유로 누군가를 모욕하는 콘텐츠를 강력히 규제한다고 발표했다. 최근 한 게이 기자가 다른 유튜버로부터 지속적으로 조롱당했는데, 초기에 CEO가 '유튜브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했다가 사내·외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결국 돌아선 것이다. 미국 메리엄-웹스터 사전은 2019년 올해의 단어로 'they'를 선정했다. 기존의 '그들'이란 뜻 대신 중성 대명사로 주목받으며 온라인 검색량이 작년 대비 313% 폭증한 덕분이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 기민하게 반응하지 않으면 소비자뿐만 아니라 유능한 직원마저 떠날 수 있다는 걸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