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공영방송 BBC가 여야 정치권의 십자포화를 받고 있다. BBC는 2017년 영국 방송통신규제기관인 오프컴(OfCom) 조사에서도 영국인의 57%가 압도적 1위로 가장 신뢰한다고 밝힌 언론사다. 그러나 정치권의 포퓰리즘적 선동과 유권자층의 극심한 편 가르기 속에서 저마다 BBC 보도의 '편파성'을 비난하면서 "지난 12일 영국 총선의 최대 패배자는 BBC"라는 평가도 나온다.
영국인들에게 BBC의 별명은 '이모' '아주머니'를 뜻하는 '앤티(Auntie BBC)'다. 국민이 뭘 알아야 할지 제일 정확하게 알려주는 '친척 아주머니'라는 뜻이다. 엄정한 공정성 때문에 2차 대전 당시 독일군들도 BBC 보도 내용은 신뢰했다고 한다. 엑서터대의 바이크 플록 교수는 "2차 대전 때 BBC 독일어 방송은 '선전 도구'로 시작했지만 연합군이 패배해도 이를 정확히 보도해 독일인들이 신뢰했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정성에 관한 한 의심을 받지 않았던 BBC를 최근 영국 정치권이 난타하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총선 승리 이후 장관들에게 BBC의 대표 시사 프로그램인 '투데이(Today)'에 출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존슨은 선거 유세에서는 "BBC 시청료를 폐지하겠다"는 말까지 했다. 보수당 정부는 현재 TV 수신 가구가 연 시청료로 154.5파운드(약 23만6000원)를 내지 않으면 형사처벌 대상이 돼 최고 1000파운드(약 152만원) 벌금을 물리는 규정을 고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BBC는 전체 재원의 75%를 시청료에 의존하고 있는데, 보수당의 이 방침은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2022년에 있을 시청료 책정 때 BBC의 기본 재정 구조를 바꾸겠다는 계획이다. 존슨은 "민영 TV들은 자체적으로 재원을 마련하는데 BBC를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했다.
보수당이 이렇게 BBC에 분노하는 것은 BBC가 탈(脫)유럽연합 여론을 주도한 보수당 세력을 "정신 나간 사람들"로 묘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보수당은 BBC가 '브렉시트 타도 공사(Brexit Bashing Corporation)'의 약자라고 한다. 또 선거 전 후보 인터뷰에서 BBC의 노련한 언론인인 앤드루 닐이 계속 답변을 피하는 존슨을 추궁하고 훈계하듯이 몰아붙인 것도 잊지 않고 있다.
노동당은 거꾸로 주요 BBC 기자들의 배경이 우파 성향이라고 비판한다. 영국 현충일인 11월 11일 존슨 총리가 조화(弔花)를 거꾸로 들었는데도, 이후 짤막한 동영상 클립(clip)에선 3년 전 그가 외무장관 시절 조화를 올바로 들고 있는 모습을 방영했다. 또 지난달 22일 BBC의 '질문시간(Question Time)' 프로에선 한 방청객이 존슨에게 "당신에게 진실이 중요하냐"고 물어 환호를 받았는데, 이후 동영상 클립에선 마치 존슨이 환호를 받는 것처럼 소개됐다. BBC는 두 사례 모두 '편집상 실수'라고 인정했다.
이처럼 BBC에 대한 공격 중에는 BBC가 제 발등을 찍은 경우도 있다. 지난 7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민주당의 유색인종 출신 초선 의원 4명에 대해 "완전히 망가지고 범죄가 들끓는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트윗한 것과 관련, BBC 아침 프로의 흑인 여성 앵커 나가 먼체티는 "인종차별주의가 밴 표현"이라고 했다. 그러자 BBC 지도부는 "먼체티는 발언(트윗)의 동기(인종차별주의)에 대해 의견을 표해서는 안 되는 BBC 지침을 어겼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BBC는 나중에 이 판정을 번복하고 '먼체티는 탁월한 기자'라고 밝혔다.
정치권의 공격에 BBC 측은 "여야 모두의 비난을 산다는 것은 우리가 잘하고 있다는 얘기"라고 반박한다. 10월의 오프컴 조사에서도 영국인의 4분의 3은 "BBC의 방송 목적은 사회에 중요하다"고 답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최근 "언론의 최대 가치는 사실과 냉정한 분석을 전하는 것"이라며 "견해의 다양성을 전달하면서도 공정성을 유지하는 지도력이 BBC에 더더욱 중요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