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삼바 증거인멸 재판서 나온 '훈계'
"불필요한 오해 불러 재판 불신 키운다" 우려나와
"범죄 재발 막는 차원에서 적절한 지적" 반응도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해외에서 삼성의 활약을 보면서 큰 자부심을 느낀다. 삼성이 더 잘 돼서 세계 최고 기업으로 성장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성장이라는 것도 법과 절차에 따라 공정하게 이뤄져야 국민으로부터 응원을 받는다."(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 소병석 부장판사)

지난 9일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관련 증거를 없앤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삼성그룹 임직원들의 선고공판이 열렸다. 재판장인 소 부장판사는 판결 이유와 양형 이유를 설명하다가 "주문 선고 전에 몇 가지 언급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재판부는 삼성그룹 내부 업무 방식에 대해 알지는 못한다"고 전제했다.

이어 "부하직원들이 상사 지시에 대해 불법과 합법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 따르는 것이 세계적인 기업 삼성에게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 생긴다"며 "(삼성그룹 임직원인) 피고인들이 책임감을 느끼고 반추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라고 되물었다. 삼성그룹 임원들이 증거를 없애라고 지시하고, 실무진들은 부당 행위에 대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검찰 수사를 앞두고 이뤄진 증거인멸 행위에 대해서도 질타했다. 소 부장판사는 "스스로 떳떳하다면 자료를 숨길 것이 아니라 공개해 해명하는 것이 정도"라며 "증거와 팩트는 그대로 두고 그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는 것이 일반적인 법률적 절차고 글로벌 기준"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편법과 반칙에 의한 성장은 박수받지 못할 것"이라며 "삼성과 삼성을 있게한 피고인들이 죄에 맞는 책임을 지고, 이 사건을 계기로 심기일전해서 법과 절차를 따르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하기를 의망한다"고 했다.

삼성 관련 재판을 맡은 재판장들의 당부는 이전에도 있었다.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부의 정준영 부장판사도 첫 재판에서 메시지를 남겼다.

정 부장판사는 "(재판) 심리 중에도 당당히 기업 총수로서 해야할 일과 할 수 있는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 진행이나 결과와는 무관하다"면서도 이 부회장과 삼성그룹에 '과제'를 내줬다. 그는 "이 사건은 삼성그룹 총수와 최고위직 임원들이 계획하고 가담한 횡령·뇌물범죄"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효적이고 실질적인 기업 내부 준법감시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연방법원의 양형기준 8장과 미국 대기업들의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는 '힌트'도 줬다. 또 이스라엘의 사례를 참고해 재벌 체제의 폐해를 시정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이 부회장을 향한 ‘당부’도 있었다. 정 부장판사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당시 만 51세의 이건희 삼성그룹 총수는 낡고 썩은 관행을 버리고, 사업의 질을 높이자는 이른바 '삼성 신경영 선언'을 하고 위기를 과감한 혁신으로 극복했다"며 "2019년, 똑같이 만 51세가 된 이재용 삼성그룹 총수의 선언은 무엇이고, 또 무엇이어야 하느냐"고 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과 같은 이 부회장의 경영 화두를 제시하라는 것이다.

'훈수 아닌 훈수'를 놓고 법조계에서는 반응이 엇갈린다. 재판의 논점을 흐리는 발언으로, 재판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 있다는 말이 나온다.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고, 판결문으로 말하면 되는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반면 처벌보다는 기업 범죄의 재발을 막는 차원에서 적절한 지적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정 부장판사는 이 부회장에게 '향후 정치권력자가 요구하면 또 뇌물을 줄 것이냐, 거절하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을 던졌다"며 "경영에 대한 훈계라기보다는, 정경유착(政經癒着)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