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간 고생이 헛수고가 됐습니다. 허탈하네요."

직장인 최모(27)씨는 작년 초부터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다. 소아암(癌)에 걸린 아이들에게 기증하기 위해서다. 머리카락을 기증하려면 보통 길이가 25㎝는 넘어야 한다. 대학 시절 머리카락을 기증한 뒤 환아(患兒)에게 '감사 엽서'를 받은 최씨는, 이후 '남자가 웬 장발이냐'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머리카락을 기르던 중이었다.

희소병에 걸린 어린이들을 위한 '머리카락 기부'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머리카락을 기증받아 환아들을 위한 가발을 제작하던 단체들이 올해부터 "더는 머리카락을 기증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2007년부터 12년간 8만6338명에게서 머리카락을 기증받은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는 2월 관련 캠페인을 중단했다. 2만5785명에게서 머리카락을 기증받아 가발을 만들어 기부해온 가발 제조업체 하이모도 4월 관련 사업을 접었다.

이런 배경에는 각종 미용 제품에 손상된 한국인의 모발(毛髮) 상태가 있다. 파마나 염색 등 머리 미용에 손상된 모발이 많아져, 기부받아도 가발을 만들 수 없는 것이다. 하이모는 최근 중국·미얀마 등지에서 수입한 모발로 가발을 제작해 어린이 환자들에게 기부하고 있다. 하이모 관계자는 "최근에는 기증받은 모발의 90% 이상이 가발로 제작할 수 없는 상태"라며 "가발 제작에 적합한 머리카락을 골라내는 비용보다, 외국에서 모발을 수입하는 비용이 더 싸다"고 했다.

1960~1970년대 가발은 한국의 3대 수출 상품이었다. 가발 수출액은 1967년 약 2000만달러에서 1970년 9357만달러로 뛰었고, 가발 산업은 한국 경제성장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이런 '가발 강국 코리아'의 위상도 이제는 옛말이 됐다. 서울 종로구 소재 한 가발 업체 관계자는 "머리카락을 30㎝ 넘게 기를 경우, 분명히 파마·염색 시술을 여러 차례 받았을 것"이라며 "이 경우 모발을 가발 제작에 쓰기 어렵다"고 했다.

이제 국내에서 머리카락 기증을 받는 곳은 A 단체가 유일하다. 이곳은 연말이 되면서 머리카락 기증이 몰리자, 대외 홍보를 중단했다. 이 단체 관계자는 "기증 물량이 너무 많아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고, 기부자들은 왜 기부 명단에 이름이 올라오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등 정신이 없다"고 했다. 또한 "혹시라도 단체 이름이 알려져 머리카락 기증이 더 들어올까 봐 걱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