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들 사이에 레벨 테스트 열풍이 분다. 자녀가 특목고를 거쳐 명문대에 진학할 수 있도록 어렸을 때부터 성취 수준을 확인하려는 취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심해지면 오히려 학습에 대한 반감이 생길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러스트=나소연

지난달 19일 열린 서울 강남구 대치동 A영어학원의 입학 설명회. 초등 학부모 30여 명이 가득 찬 강의실에 공지가 붙었다. 대리 시험을 단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최근 레벨 테스트 대리 시험 사례가 확인됐습니다. 이런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앞으로 응시자의 사진이 첨부된 여권 등 신분증도 확인할 방침입니다. 더 공정한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한 절차이니 협조 부탁합니다.'

이날 설명회는 학원이 추가로 마련한 행사였다. 앞서 두 차례 설명회가 있었지만, 신청자가 많아 예정에 없던 추가 설명회를 개최했다. 설명회에 참석한 한 학부모는 "다른 학원은 레벨 테스트 신청 경쟁이 치열해 한 군데도 시험 신청을 못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또 다른 학원 입학 설명회에 간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학원 레벨 테스트 대비해 과외받기도

학원가에 대리 시험이 등장할 정도로 레벨 테스트 광풍이 불고 있다. 레벨 테스트는 학원생이 수준에 따른 수업을 받도록 학습 능력을 평가하는 시험이다. 최근 높은 수준의 레벨 테스트를 통과해 일찍부터 상급반에 배정받아야 대입(大入) 준비에 유리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레벨 테스트 경쟁이 더 심해졌다. 유치원생 자녀를 둔 양래교(37·서울 종로구)씨는 “수준 높은 영어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야 이후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명문대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일부 학부모 사이에 팽배해 있다”고 했다. 국제중이나 특목고 등 상위권 학교에 가기 위해선 ‘학원 상급반’ 진학이 필수라는 얘기다.

학업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학원의 레벨 테스트를 보기도 한다. 초등학교 2학년 학부모 윤모(41·경기 고양)씨는 “유명 영어학원 레벨 테스트를 통해 말하기나 독해 등 부족한 부분을 주기적으로 확인, 학업 계획을 다시 짠다”고 말했다.

레벨 테스트 준비 과정도 치열해졌다. 영재 사고력 수학 문제집을 사서 푸는가 하면, 학원별 레벨 테스트 출제 유형을 분석하기도 한다. 어렵기로 소문난 B수학학원의 레벨 테스트가 특정 대학이 후원한 경시대회 문제와 유사하다는 소문이 돌자, 아예 경시대회 기출문제를 풀게 하는 일도 있다.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선 재(再)시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금전 지출도 상당하다. 대치동의 레벨 테스트 비용은 회당 1만원대에서 최근 2만~3만원대로 올랐다. 학부모들에 따르면 보통 자녀 1명이 한 해 치르는 레벨 테스트는 6~7회다. 많으면 10회도 받는다. 20만~30만원을 레벨 테스트 응시에만 쓰는 셈이다.

‘레벨 테스트 전용 과외’도 있다. 짧게는 1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 진행되는 이른바 ‘새끼 과외’다. 새끼 과외는 시간당 5만~10만원 선이다. 대치동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3학년 학부모 최모씨는 “6개월 넘게 새끼 과외를 받고 있다”며 “대치동에선 레벨 테스트를 위한 새끼 과외가 이미 흔하다”고 말했다.

레벨 테스트를 대비하기 위해 또 다른 학원에 다니는 일도 있다. 3년째 영어 유치원 레벨 테스트 과외 교사로 활동한 강모(28)씨는 “날이 갈수록 문의 전화가 늘고 있다”며 “최소 3개월 전부터 레벨 테스트를 대비하는 방식으로 지도한다”고 전했다.

◇중 3 시험에 '미적분'… 선행학습 금지법 위반 소지

레벨 테스트의 난도는 만만치 않은 수준이다. 여러 분원을 둔 B학원의 최상급반 합격선은 100점 만점에 40점이다. B학원이 응시자의 성적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달 레벨 테스트를 본 초등 2~3학년 3589명의 평균 점수는 12.4점에 그쳤다. 학부모 사이에서 "풀라고 낸 문제가 아니라 틀리라고 낸 문제 아니냐"는 한탄이 나올 정도다. 시험을 치다 우는 아이도 많다.

레벨 테스트는 대부분 선행학습을 금지한 현행법을 위반했을 소지가 크다. 수도권 과학고에 다니는 한 학생(18)은 "중 3 때 특목고반에 가기 위한 레벨 테스트를 봤는데, 고교 2학년 교육과정인 미적분 문항이 출제됐다"며 "대부분 레벨 테스트 준비와 시험은 선행학습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일부 학원은 레벨 테스트를 이용해 성업하고 있다. 레벨 테스트로 명성을 얻은 영어와 수학학원은 각각 10여 곳. 지방에서 상경해 레벨 테스트를 보는 경우도 있고, 강북 학부모가 레벨 테스트를 위해 강남의 학원을 찾기도 한다. B학원도 레벨 테스트로 이름을 알린 덕분에 대구·대전·인천 등에 이달 중 분원을 열 예정이다.

◇조기 '번아웃' 우려도

이 학원들은 '공포 마케팅'으로 학부모를 자극한다. 레벨 테스트를 통해 상급반에 가지 못하면 나중에 뒤처진다는 말을 들은 학부모는 아이를 위해 지갑을 열 수밖에 없다. 레벨 테스트에 떨어진 아이에게 학원 강사가 "별도 과외를 받으면 기초반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하는 일도 있다.

이성호 중앙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열된 교육열이 빚은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며 "대학 입시를 위해 아이들을 혹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어른들의 문제"라고 했다. 이어 "어릴 때부터 무리한 학습평가에 노출되면 이른바 '번아웃'이 빨리 찾아와 되레 학습에 반감을 가질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김진우 쉼이있는교육위원장은 "레벨 테스트가 교육의 불평등을 확대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며 "이런 흐름이 지속하면 값비싼 학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은 경쟁에서 뒤처져 교육 양극화를 부를 우려가 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