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작곡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이는 아마도 주세페 베르디(1813~1901)가 아닐까? '라트라비아타' '리골레토' '아이다' '오텔로' 등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제목이다. 구십 평생에 26편의 오페라를 남긴 베르디는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런 베르디는 음악계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가 한창 활동하던 1840~1850년대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에 주권을 빼앗긴 상태였다. 그런 시기에 이탈리아의 여러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그런데 그의 많은 오페라에는 전쟁 장면이 등장한다. 전쟁이 언급되는 작품만 20여편을 헤아린다. 그런 전쟁 장면들은 압제에 항거하며 애국심을 고취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나부코'에서는 아시리아에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들의 합창'을 부르면서 조국을 빼앗긴 처지를 한탄한다. 그것은 마치 이탈리아의 실정과 흡사하였다.
베르디 오페라 26편 중 20편에 전쟁 등장
막이 내리면 객석에서는 박수와 함께 "비바 베르디!"라는 함성이 터지곤 하였다. '비바'는 만세라는 뜻이며, '베르디'는 당시 이탈리아의 유일한 독립 왕국이던 사르데냐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Vittorio Emanuele Re D'Italia)'에서 각 단어의 알파벳 앞글자만 따로 떼어내 합치면 'VERDI'가 되니, '비바 베르디'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를 통일 이탈리아의 왕으로!"라는 뜻도 된다. 독립을 염원하는 관객은 오페라가 끝나면 "비바 베르디"를 외쳐댔고, 오스트리아 경찰은 작곡가에 대한 칭송을 제지하기도 애매하였다. 그러니 공연마다 베르디는 연호되었고, 그렇게 베르디는 유명해졌다. 실제로 베르디의 오페라는 객석의 피를 끓어오르게 하였다. 관객들은 '조반나 다르코'에서 영국에 맞서서 일어서는 프랑스 군중을, '돈 카를로'에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플랑드르 시민을, '일 트로바토레'에서는 아라곤과 싸우는 집시들을, '시칠리아섬의 저녁 기도'에서 프랑스에 투쟁하는 시칠리아 백성을 보면서 조국 해방의 의지를 키웠다.
결국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를 몰아내고 1861년에 감격적인 해방과 통일을 이루었다. 그리고 베르디는 어느 시골의 요청으로 그들을 대변하기 위해 기꺼이 출마하여 통일 이탈리아의 초대 상원 의원이 된다. 그는 지금도 이탈리아 통일에 기여한 주요 인물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베르디의 음악은 조국 통일을 향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염원이 식지 않도록 계속해서 불을 지폈던 것이다.
5년 후에 임기를 끝내고 정계에서 은퇴한 베르디는 낙향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그러면서 80세에 희가극 '팔스타프'를 발표하는 등 성실한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베르디는 만년에 고전음악가로서는 역사상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이 되었다.
베르디 "내 최고의 작품은 안식의 집"
그런 베르디는 86세에 자신의 전 재산을 필생의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바로 그가 밀라노에 세운 '안식의 집(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이다. 이곳은 은퇴 후에 갈 데가 없거나 생계가 막연해진 음악가들을 위한 양로원이다. 베르디는 "나는 행운 덕에 명성과 재산을 모았지만, 그것을 위해서만 일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의 길에 같이 헌신했던 음악가 중에는 빛을 보지도 못하고 은퇴 후 힘든 노후를 보내는 사람이 많다. 그들 모두가 내가 사랑하는 동료다"라면서 재산을 그들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안식의 집은 건축가 카밀로 보이토가 설계한 아름다우면서도 기능적인 붉은 벽돌 건물로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설계와 시설을 갖춘 선구적 양로원이다. 이곳은 이후 이탈리아 전역 양로원 건축의 귀감이 되었다. 은퇴한 음악가들은 평화롭고 안락한 이곳에서 함께 연주도 하고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레슨도 한다. 여전히 누구는 피아노를 치고 누구는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매일 음악이 그치지 않는 곳이다. 더스틴 호프먼이 감독한 영화 〈콰르텟〉은 이곳을 모델로 만들어졌다.
자식이 없었던 베르디의 마지막 유언은 먼저 간 아내와 함께 자신을 이곳 동료들 사이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밀라노에는 시민은 시립공동묘지에만 안장할 수 있다는 법이 있었지만, 시 당국은 최초의 예외로 베르디 부부의 묘를 이곳에 허락하였다.
밀라노에 가면 무엇을 보고 어디를 찾아가는가? 패션 가게만 기웃거려서는 그들의 정신을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명품가에서 쇼핑하는 이탈리아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거의가 관광객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일깨우지 않는가? 그들은 새로 나온 명품을 사기보다는 낡고 오래된 물건을 고쳐서 쓰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 그것이 진정한 명품이다. 나는 안식의 집을 보면서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안식의 집은 밀라노 정신의 핵심이며 예술의 상징이다.
안식의 집을 찾으면, 지금도 거주하는 할머니가 나와서 맞아줄 것이다. 입장료는 없지만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손을 잡아주는 게 도리일 것이다. 들어가면 안마당의 맨 안쪽에 베르디 부부가 누워 있다. 그러니 베르디는 지금도 매일 자신의 음악을 듣고 있는 셈이다. 여기의 음악가들은 오늘도 연주하기 전에 안식처를 마련해준 베르디를 생각한다. 만년에 누가 베르디에게 물었다. "선생님이 남긴 많은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답했다. "그것은 안식의 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