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교통사고 피해 부모들 인터뷰]
文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서 주목받은 '민식이법'만 추진
부모들 "시작도 못한 아이들법 수두룩한데…" 섭섭함 토로
민식君 부모 "일단 첫 단추 꿰 고맙지만 좋아할 수만 없어"
"10분도 안 돼 ‘민식이법’만 법안소위 통과된 것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해인이법’, ‘태호·유찬이법’, ‘하준이법’…. 아이들 법안을 함께 논의해 달라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대통령이 언급했다고 민식이법만 통과시키는 정치인 분들 참 야속하고 싫습니다."
지난 19일 문재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서 처음으로 지목받은 질문자는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은 김민식(당시 9세)군의 부모였다. 아빠 김태양(34)씨는 숨진 아들의 대형 영정사진을 높게 들어올렸고, 300명의 ‘국민 패널’ 중 가장 먼저 문 대통령의 지목을 받았다. 엄마 박초희(32)씨는 2분여 동안 울면서 "어린이 생명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켜달라"고 호소했다. 이른바 ‘민식이법’은 단숨에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다. 국민청원도 이내 20만명을 돌파했다.
이틀 뒤 ‘민식이법’은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소위를 통과했다. 불과 10여분 만이었다. 그러나 이날 문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에선 미처 주목받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민식이네와 나란히 앉아있던 김태호(당시 8세)군과 이해인(당시 4세)양, 최하준(당시 4세)군의 가족들이었다. 발언 기회를 잡기 위해 모여 앉았고, 누구라도 발언자로 지목되면 네 가족의 사연을 함께 이야기하기로 정했다고 한다. 마이크를 잡은 민식이 엄마는 문 대통령에게 "민식이와 태호, 해인이, 하준이 등 교통사고로 숨진 아이들을 지켜달라"고 했었다.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지난 20~21일 이 아이들의 부모를 인터뷰했다.
◇스쿨존서 목숨잃은 민식이..."법안소위 통과했지만 좋아할 수만은 없어"
민식이는 지난 9월 11일 충남 아산시 한 도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스쿨존이었는데도 이를 무시한 채 과속한 차량이 아이를 덮쳤다. 민식이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강훈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스쿨존에서의 교통사망사고는 가중처벌해야 한다"며 도로교통법(일명 ‘민식이법’) 개정안을 지난달 13일 대표발의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민식이 부모는 앞서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교통사고 피해자 가족들과 힘을 보태기로 했다. 카카오톡 단체 대화방을 만들었고,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글도 올렸다. 지난 14일엔 국회를 찾아가 기자회견도 열었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법을 빨리 좀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민식이 아빠 김씨는 "답답한 마음에 부모들이 ‘뭐라도 해보자’고 모였다"고 했다.
문 대통령 ‘국민과의 대화’ 때도 당초 배정 받은 자리에 따라 흩어져 있었지만, 주변 참여자들에게 부탁해 모여 앉았다. 이 덕분에 ‘민식이법’은 법안소위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지만 아직도 행안위 전체회의와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국회 본회의 등 여러 절차를 남겨두고 있다.
김씨는 "감사하지만, 한편으론 송구스럽고 죄송해요.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민식이법만 주목을 받게 됐으니까요. 다른 가족들을 볼 때 마음 한켠이 무거운 게 현실입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민식이뿐 아니라 태호·해인이·하준이네를 모두 대표해서 나선 것이었다"면서 민식이법 통과를 계기로 다른 아이들 법안도 하루 빨리 논의되고 통과되는 데 힘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태호가 부른 ‘축구클럽 차량’ 안전 문제…6개월째 감감무소식
태호는 지난 5월 15일 인천시 연수구 송도국제도시 인근 사거리를 지나던 FC인천시티 축구클럽 스타렉스 승합차 안에 타고 있었다. 당시 차량을 운행하던 축구코치(23)는 과속을 하다 마주오던 카니발 승합차를 들이받았다. 태호와 친구 정유찬(8)군은 숨졌고, 초등학생 3명도 다쳤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은 지난 6월 체육시설을 이용한 교습업도 도로교통법에서 규정하는 어린이의 안전한 통학을 위한 의무를 준수하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태호·유찬이법’(체육시설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축구클럽 차량’은 어린이통학차량에 포함되지 않아 사고 피해가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안은 6개월째 계류 중이다.
태호 부모는 "우리 가족의 시간은 사고가 난 5월 15일에 멈춰 있다"고 했다. 부모는 생업을 놓았고, 집밖에도 나가지 않고 있다. 아빠 김장회(37)씨는 "바깥에 나가면 아이들과 노란 차가 보이는데 그때마다 마음이 미어진다"며 "태호가 클 적 모습, 앞으로 커갈 모습들이 겹쳐 보이는 게 너무 괴롭다"고 했다. 그는 "민식이법이 통과되는 걸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고 했다.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이 스쿨존 관련 법만 콕 집어 이야기하니…. 아이들법 모두가 하나 같이 당연하고 중요한 것들인데, 너무 속상했다"고 했다.
엄마 이소현(37)씨는 임신 중이다. 태호에게 동생을 만들어 주기로 했던 약속을 지키는 중이라고 한다. 이씨는 "지금도 많은 태호들이 학원 차량에 올라타고 있지 않느냐"며 "우리 태호 같은 일 더이상 만들지 말라는 지극히 당연한 법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해인이의 ‘어린이안전법’…"3년7개월 동안 아무런 대답 없었다"
해인이는 2016년 4월 14일 경기도 용인에서 어린이집 차량에 치여 결국 유명을 달리했다. 하원 버스를 타려고 경사가 있는 도로 가에 줄을 서 있었는데, 주차돼 있던 한 SUV차량이 브레이크가 풀리면서 해인이를 덮친 것이다. 어린이집 교사들의 응급 조치도 미흡했다. 해인이는 병원으로 이송 도중 숨졌다.
그해 8월 표창원 민주당 의원은 ‘해인이법’(어린이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13세 미만의 어린이에게 위급한 상태가 발생하거나 발생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을 때 누구든지 응급 의료기관으로 옮기는 등 필요한 조치를 다 하도록 하고, 사고를 방치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은 같은해 11월 행안위 법안소위에 올랐지만 3년 넘게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해인이 아빠 이은철(38)씨는 "아이가 떠난 뒤 8개월 정도는 아무 것도 못하고 지냈다"면서 "최근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면서 다시 목소리를 내기로 다짐했다"고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라는 걸 느껴서 그냥 살았는데, 태호·민식이·하준이 부모님을 알게 돼 같이 청원도 올리고 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며 "아이를 위해 뭔가를 할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라고 했다.
최근 민식이법만 통과되는 모습을 보며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해인이법을 올려놓고 3년 7개월을 기다렸다"면서 "이렇게 10분 만에 될 것을 여태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화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들은 힘겹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저희들의 목소리를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준이는 ‘주차장 안전 문제’ 던졌지만…"2년 동안 바뀐 것 하나도 없어"
2017년 10월 1일 경기도 과천의 서울랜드 주차장에서 주차돼 있다가 미끄러져 내려온 차량이 하준이를 덮쳤다. 차에 치인 네살배기 하준이는 쓰러졌고, 엄마는 정신을 잃었다. 하준이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목숨을 잃었다.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하준이 엄마 고유미(37)씨는 "사고가 난 지 2년이 넘었지만 변한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올해 초 아들을 잃은 서울랜드를 찾았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어서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그는 "조금이라도 바뀌었으면 했는데, 법 하나 만드는 것도 안되고 있으니 참 답답할 뿐"이라고 했다.
하준이법(주차장법 개정안)은 민홍철 민주당 의원이 작년 11월 발의했다. 경사가 있는 주차장에는 주의 표지판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았다. 무소속 이용호 의원도 지난 7월 경사진 곳에 주차장을 설치하는 경우 미끄럼 방지를 위한 고임목 설치 등을 의무화한 ‘제2하준이법’(주차장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물론 진척은 없다.
하준이 엄마 고씨는 "문 대통령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는 "국민과의 대화 때 대통령에게 ‘정부도 노력하겠다’라는 답변을 듣고 싶었다"면서 "그런데 대통령은 ‘국회에서 통과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해진 답변만 내놓았다"고 했다. 또 "아이 잃은 부모들이 길거리에서 혼자 울부짓고 청원 동의를 받으면서 ‘다른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외칠 때 대통령은 어디 계셨느냐"면서 "아이들이 안전한 정상적인 사회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으셨느냐. 민식이·태호·해인이 그리고 우리 하준이까지 아이들 이름 붙인 법은 당연히 필요한 법이다. 그 약속 지켜달라"고 했다.
아이들법은 내년 4월 20일 20대 국회가 종료될 때까지 통과되지 않으면 모두 자동폐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