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온 시외버스가 청주 톨게이트를 지나자마자 좌회전했다. 몸이 오른쪽으로 급하게 기울어졌다. 자세가 정상으로 돌아오자 이 고장의 명물이 눈앞에 펼쳐졌다. 플라타너스 가로수길. 여전히 반듯하고 청량했다. 이 감흥은 갈아탄 택시에서 흘러나온 라디오 뉴스 속보로 산산조각이 났다. 화성 연쇄살인 사건 피의자 이춘재가 1991년 초 청주에서 여성 2명을 추가로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또 청주야…."
택시 기사가 조건반사처럼 혼잣말을 했다. 올해 신문·방송으로 접한 이 도시 소식은 '맑고 깨끗한' 지명과 달리 흉흉하기 짝이 없다. 한범덕 청주시장이 최근 간부회의에서 "이춘재나 (전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고유정은 사건을 벌이고 청주에 들어와 거주했을 뿐이다. 범죄 도시라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외지인이 애꿎은 청주에 먹칠을 한 것이라고 시민들도 믿고 싶었다.
그런데 이달 초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박완수(자유한국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전국 관서별 4대 범죄통계'(2018년 1월~올해 9월)에 따르면 청주 흥덕경찰서 관내에서 살인 사건이 12건 발생해 전국 255개 경찰서 가운데 둘째로 많았다. "서류는 거짓말을 안 한다"는 영화 '살인의 추억' 대사가 떠올랐다. 지난 15일 청주로 달려갔다.
충북 전체 살인 사건의 70%
작년 1월부터 지난달까지 전국에서 4대 강력범죄 46만4821건이 일어났다. 살인 791건, 강도 818건, 절도 17만6613건, 폭력 28만6599건 등이다. 강력범죄 건수를 경찰서 관할 지역별로 보면 경기 평택(6193건)이 으뜸이었고 수원 남부(5648건), 부산진(5609건), 부천 원미(5531건), 서울 송파(5498건) 순이었다.
청주에 있는 경찰서 3곳 중에서는 흥덕경찰서 관내(흥덕구와 서원구 일부)가 3227건으로 강력 범죄가 가장 많았다. 이 도시 사람들은 무엇보다 살인 사건 전국 2위라는 사실에 놀랐다. 흥덕서 담당 지역에서만 12건. 서울 영등포(17건)에 이어 마산 합포(12건), 경기 오산(11건), 서울 강서(11건)와 더불어 살인 사건이 잦은 톱5에 꼽힌 것이다. 청주 상당서 관내에서는 7건, 청원서에선 2건으로 조사됐다. 충북 전체 살인 사건(30건) 중 70%(21건)가 청주에서 터진 셈이다. 어떤 패턴은 없고 우발적인 게 대부분이다.
청주 토박이 김모(47)씨는 "흥덕구에는 공단이 있고 원룸에 혼자 사는 외지인이나 여성이 많다"며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 유흥가가 모여 있어 폭력 사건도 빈발한다"고 말했다. 특히 하복대 촌골사거리는 청주를 대표하는 유흥가다. 실제로 술집과 포장마차, 나이트클럽과 노래방, 모텔과 안마방이 즐비했다.
이날 해가 지고 저녁 7시를 넘기자 4차선 도로는 점점 주차장으로 변해갔다. 이곳에서 근무했다는 경찰관 신모씨는 "감성 주점(클럽)과 술집이 밀집돼 유동인구가 많고 속칭 '물이 좋아' 천안 등 주변 지역에서도 원정 온다"며 "원룸 밀집 지역도 흥덕구에 집중돼 있어 사건이 많고 바쁘다"고 했다.
청주가 어쩌다 이렇게
청주(淸州)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재위하던 시절 지어졌다. 통일 신라 시대엔 오소경(五小京) 중 하나인 서원경을 이곳에 두었다. 세계 최고(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直指)를 간행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청주시와 청원군이 2014년 7월 통합 청주시로 새로 출범하며 면적은 6배나 넓어졌다. 서울시의 1.5배에 이른다. 청주는 무색무취한 고장으로 과거에는 양반의 도시, 교육의 도시라 불렸지만 최근에는 강력 사건으로 이미지가 추락했다. 청원군에서 태어나 청주에 오래 산 박모(76)씨는 "청주가 커지고 외지인이 들어와 섞여 사는 바람에 흉악한 사건이 부쩍 늘었다"며 "청풍명월의 고장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살았는데 요즘엔 뉴스 보기가 겁난다"고 했다.
'크림빵 뺑소니' '네 살 의붓딸 암매장' '19년 축사 노예 만득이' '딸 성추행 상담교사 살해' '임플란트 불만 품고 치과의사에게 흉기' '아내가 남편 수십 차례 찔러 살해' '대낮 터미널 살인 사건'…. 지난 몇 년간 이 도시에서 일어난 강력 사건들이다. 범행 동기가 의아하거나 범행 수법이 잔혹해 전국적인 주목을 받곤 했다.
청주에서 강력 범죄가 발생하면 '순한 고장에서 저런 일이?'라는 의외성 때문인지 지명을 앞세워 보도하는 일도 상대적으로 많다. 이날 해장국 집에서 만난 사람들은 "청주는 경부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가 만나는 등 전국 어디서나 접근성이 좋고 국제공항이 있어 빠져나가기도 수월하다"며 "나쁜 짓 저지르고 숨기에도, 도피하기에도 편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근년 들어 청주에 부임해오는 검사들은 깜짝 놀란다. 강력 사건이 뜻밖에 자주 터지기 때문이다. 청주지검 관계자는 "청주는 구(區)가 4개인데 경찰서는 3개뿐이고 특히 면적이 넓은 흥덕구는 터미널과 공단, 유흥가 등 치안에 좋지 않은 조건을 두루 가지고 있다"며 "검사들이 '작은 도시에 왜 이렇게 살인 사건이 많냐'고 묻곤 한다"고 전했다.
억울한 측면도 있다
이번에 공개된 전국 4대 강력 범죄 통계를 보면 강도 사건은 부산진·대전 중구·경기 평택에서 빈발했다. 절도 사건은 부천 원미·서울 송파·부산진에서, 폭력 사건은 경기 평택·수원 남부·경기 의정부에서 가장 많이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 화성 동탄, 경북 울릉·영양, 전북 장수 등은 거꾸로 강력 범죄 발생이 적은 곳으로 조사됐다. 박완수 의원실은 "범죄가 특정 지역에 편중되는 양상"이라며 "이런 상황과 패턴을 참고해 치안 체계를 선제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 통계에는 맹점도 있다. 살인과 살인 미수, 자살 방조 등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살인 사건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청주 흥덕경찰서 신지욱 형사과장은 "올해 관내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2건뿐이고 모두 가정 폭력으로 시작된 살인 미수 사건"이라며 "최근 5년치를 살펴도 작년(10건 중 실제 살인 사건은 4건)에만 유달리 많았는데, 범죄 도시 운운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고 속상하다"고 했다. 착시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인구 1만명당 살인 사건을 보자. 해당 기간에 청주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21건)을 인구(84만명)로 나누면 0.25가 나온다. 전국 평균(0.15)보다는 높다. 하지만 경북 영덕(1.08), 경기 오산(0.5), 서울 영등포(0.46), 경남 마산(0.42), 경북 칠곡(0.34), 전남 여수(0.32), 제주(0.31), 경북 포항(0.26) 등지보다는 낮은 수치다. 규모가 비슷한 경기 부천(83만명)과 견주면 청주는 살인 사건은 많고 강도나 절도, 폭력 사건은 적은 도시다.
이수정(범죄심리학) 경기대 교수는 청주에서 늘어나는 흉악 범죄에 대해 "시민들이 범죄에 대해 공포가 크고 신고율도 높은 서울경기권과 달리 지방, 특히 가부장적 전통 문화가 공고한 지역에서는 이웃의 가정 폭력에 개입하기를 꺼리고 상대적으로 둔감하다"며 "급속히 도시화되는 과정이라면 낯선 사람이 많아지고 불안정 변수가 커질 텐데 치안력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진단했다. "치안력 확보 못지않게 범죄 예방 감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민을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