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인조 모피의 미덕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요즘 인조 모피는 '짝퉁' 티를 못 내서 안달이다. 인조 모피가 윤리적 소비라는 옷을 입고 '페이크 퍼(Fake fur)'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동물의 가죽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에코 퍼' '비건 패션' 등으로도 불린다. '인조 모피라는 느낌이 확실히 나야만 한다'는 전제가 '패션 피플'들의 착용 조건이다.
'페이크 퍼'는 세계적 유행이다. 지난 2년간 샤넬·구찌·랄프로렌 등 유명 브랜드가 천연 모피 의류 제작을 중단했다. 도의적으로 옳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업계에 따르면 인조 모피 제품 판매량은 2016년부터 연평균 30~40%의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인조 모피 시장은 앞으로도 연평균 19% 성장해 4년 뒤에는 1억2921만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어떻게 가짜보다 더 가짜같이 만들까. 인조 모피 제조 공장에는 가짜처럼 보이기 위해 다양한 주문이 들어 온다고 한다. 백문이 불여일견. '아무튼, 주말'이 갔다.
지난 8일 경기도 포천에 있는 인조 모피 제조 공장 '찬영퍼'를 찾았다. 조찬조(60) 대표는 45년간 인조 모피를 다뤘다. 영세 업체뿐 아니라 '베네통' '노스페이스' 등 유명 브랜드의 한국 지점 제품도 만든다. 조 대표는 "올해 매출이 2.5배가량 늘었다"며 "지난해까지는 공장을 3개월만 가동했는데, 주문이 늘어나 올해는 일년 내내 기계를 돌려야 한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20분 대화하는 동안 조 대표의 휴대폰에는 문의 전화가 여섯 번 왔다.
최근 업체들의 요청도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천연 모피 느낌의 'AH(Animal Hair)', 밍크와 유사한 'DDF(Dope Dyed Fiber)'가 주를 이뤘다. 지금은 누가 봐도 인조 모피라는 느낌을 원하는 곳이 많다. 알록달록 줄무늬 모양, 형광색 등 천연 모피로는 연출 불가능한 디자인이다. 전문 기술이 필요한 공정이 아닌 몇 가지 단순 작업을 직접 체험했다.
제일 처음 단계는 배합이다. 공장 한쪽에 스티로폼처럼 생긴 정육면체 모양의 섬유 뭉치가 있었다.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아크릴·폴리에스터 등으로 이뤄진 합성 섬유다. 아크릴은 털, 폴리에스테르는 가죽의 질감을 천연 모피와 유사하게 낼 수 있다. 이 뭉치를 손으로 뜯어 바닥에 넓게 펼치고, 섬유 유연제로 적셔준다. 그 위 다른 뭉치를 또 뜯어 쌓는다.
공정 대부분은 기계를 이용하지만 이 작업만은 직접 손으로 한다. 원하는 색, 털 길이, 광택 등을 연출하기 위해 재료의 비율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레시피'는 따로 없다. 특히 요즘은 모든 업체의 요구가 다르다. 결과물을 예상과 얼마나 비슷하게 내는지가 기술력이라고 한다. 가령 회색 모피를 만들고 싶다면 하얀색과 검은색 뭉치를 반반씩 쓰면 된다.
이 뭉치들에 열과 압력을 가해 실로 만든다. 뜨거운 바람을 내뿜는 기계 안에 합성 섬유를 넣고, 바람 배출구를 통해 3.3㎡(1평) 정도 되는 방에 뿌려준다. 2시간가량 지나면 열과 풍압을 받은 합성 섬유가 솜처럼 부풀어 조각조각 날린다. 방에 직접 들어갔다 나오니 온몸에 솜뭉치들이 붙어 있었다. 이 솜뭉치들은 롤러 기계로 들어간다. 롤러에는 침이 박혀 있어 섬유를 빗질하듯 가늘게 펴 준다.
바느질 기계에 펴진 실을 넣는다. 이 기계에는 1000개가 넘는 바늘이 달려 털 모양으로 바느질을 한다. 이런 편직(編織) 공정이 끝나면 무스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납작한 모피의 모습을 갖춘다. 여기까지가 전(前) 공정이다.
후(後) 공정은 촉감, 길이 등 모피의 모양을 결정하는 과정이다. 여우나 라쿤의 윤기 흐르는 털을 만들려면 압력과 열을 덜 가하고, 광택을 내주는 천연 약품을 바른다. 무스탕처럼 짧고 몽글몽글한 털을 연출하려면 압력과 열을 많이 가해 말린다.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해주는 '매직 파마', 물결 모양으로 만드는 '웨이브 파마'를 하는 원리와 비슷하다.
열을 가하는 동안 틀을 이용해 모피에 무늬를 넣을 수도 있다. 과거에는 밍크 등 동물의 무늬를 냈다. 최근에는 모피에 알파벳 등 글씨를 새기거나 특정 브랜드의 로고를 넣어서 인조 모피라는 각인을 새긴다. 이렇게 완성된 원단을 주문 업체에 보내면 각 업체가 자르고 덧대서 옷을 만든다.
직장인 강모(25)씨는 최근 새로 산 '페이크 퍼' 코트를 물세탁하고 드라이기로 말린다. 인조 모피에 열을 가해 뻣뻣해지게 만들면 천연이라고 오해 사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강씨는 "새 제품 상태는 부드러운 재질 탓에 천연 모피처럼 보일 수도 있다"며 "'환경 생각은 안 하는구나'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겨울이 오기 전 미리 대비하고 있다"고 했다. 강씨는 지난 8일까지 다섯 번 세탁하고 드라이기로 말렸다.
짝퉁 취급을 받으며 신분을 감춰야 했던 인조 모피가 젊은 층의 '플렉스(자랑한다는 뜻의 유행어)' 수단으로 다시 태어났다. 소셜 미디어에 '#페이크퍼'와 '#윤리적 소비'라는 해시 태그(검색을 쉽게 하기 위해 단어 앞에 #을 붙이는 것)는 같이 올라온다.
업계 관계자들은 '페이크 퍼' 유행의 이유를 소셜 미디어에서 찾았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쉽게 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되자 천연 모피를 위해 가죽을 벗겨 내는 적나라한 영상들을 쉽게 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천연 모피 의류 판매를 중단한 한 브랜드 관계자는 "살아 있는 동물들의 털을 마구 뽑는 영상이 판매 중단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며 "과거에도 동물 보호를 위해 인조 모피를 입자는 운동은 꾸준히 있었지만, 찾지 않으면 볼 수 없던 영상이었다는 점이 다르다"고 했다.
'페이크 슈머(fakesumer)'의 뜻도 달라졌다. 지금까지 '페이크 슈머'는 비싼 진짜가 아니라 기분만 낼 수 있는 저렴한 가짜를 찾는 소비자를 뜻했다. 과장하면 김치찌개 전문점을 가는 대신 김치찌개 맛이 나는 라면을 먹거나 옥탑방 옥상의 저렴한 텐트에서 자면서 캠핑 기분을 내는 식이었다.
지금은 '해로운 진짜'보다 의미 있는 가짜를 구매하는 소비자를 가리킨다. 동물 보호를 위해 콩으로 만든 가짜 고기를 먹고, 진짜 꽃 대신 조화(造花)를 찾는다. 고급스러운 가짜라는 의미의 '클래시 페이크(Classy fake)'라는 단어도 쓰인다.
'페이크 슈머' 이준호(32)씨는 지난해 동물 털 대신 폴리에스테르로 제작된 '비건 패딩 점퍼'를 구매했다. 흔히 '비건'은 고기를 먹지 않는 채식주의자를 뜻하지만, 이씨에게는 음식을 넘어 평소 생활에도 적용된다. 이씨는 "패딩을 만들 때 부드러움을 위해 거위의 목, 가슴, 겨드랑이에 있는 털을 뽑아 쓴다"며 "옷뿐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제품이 무언가의 고통으로 탄생하지 않았나 자세히 살핀다"고 했다.
100만~200만원을 호가하는 페이크 퍼 코트도 있다. 명품 브랜드에서 생산하는 제품으로 저렴한 천연 모피 코트보다 더 비싼 제품들이다. 인조 모피 제조사 관계자는 "인조 모피 제작 비용은 천연의 10분의 1 정도인데, 브랜드 값인 셈"이라고 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가 아닌 '어떻게 먹고 사느냐'를 고민하는 사회의 단면"이라며 "'가치 있는 가짜'는 의식주를 넘어 문화생활 등으로 더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