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혜연 2019 신춘문예 시 당선자

온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던 길이었다. 주말이라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잠시 휴게소에 들렀더니 부모님이 차례로 화장실에 다녀오시면서 말씀하셨다. 엄마는 '인간'이 많다고, 아빠는 '사람'이 많다고. 그때 처음으로 인간과 사람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같은 장면을 보고 왜 누구는 인간을, 누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지. 분명 같은 의미인데도 생겨나는 두 단어의 단차는 무엇일까.

인간은 사람보다 더 딱딱한 느낌이다. 한자어가 갖는 특징일 수도 있지만, 인간은 어쩐지 신이나 동물 같은 단어들이 대립 항에 놓일 것 같은 말이다. 동물과는 다른, 신과도 다른 것이 인간이라는 종(種). 그렇다면 사람은 어떨까. 어느 정도의 도덕과 양심이 있을 거라 기대되는, 최소한의 윤리적인 존재라 생각하는 부류를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인간은 우리 존재의 종류를 구분 짓는 명칭이고, 사람은 그 속에서 우리의 기대감이 투영되는 대상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결국 두 단어 모두에게 우리의 긍정적 상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다만 그 긍정적인 상은 단지 인간이나 사람으로 태어난 것만으로는 지켜낼 수 없는, 우리가 끝없이 파헤치고 가 닿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대상이다. 태어난 김에 산다는 요즘의 말은 앞선 맥락보다는 벽에 닿은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청춘의 관점에서 읽는 편이 더 맞을지도 모르지만, 우리가 태어난 김에 태어난 대로 살기만 해서는 인간에도 사람에도 포함될 수 없지 않겠나 하는 두려움이 든다.

윤동주의 시 '아우의 인상화'에는 자라서 무엇이 되겠냐 묻는 형과 사람이 되겠다 대답하는 동생이 나온다. 우리는 이미 사람이자 인간이지만, 스스로를 그런 존재로 유지해가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일임을 알고 있다. 가끔 세상이 너무 무서운 일들만 일어나는, 인간적이지 못한 곳처럼 느껴지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저마다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찾으려 애쓴다. 때로는 아주 귀찮고 때로는 너무 버거운 일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 사는 곳이란 결국 완벽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사는 곳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