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살아난 버스안내양의 31년 전 기억…이춘재 입 열게 해
5단계 진행…최면자-피최면자 '신뢰 형성'이 중요
뺑소니 차량 번호판·범인 인상착의 수사에 주로 활용
피의자보다는 피해자·목격자가 법 최면 주요 대상
"제가 목격한 얼굴이 이춘재의 얼굴이 맞는 것 같습니다."
화성연쇄살인사건 당시 용의자를 목격했던 ‘버스 안내양’은 31년 만에 다시 ‘화성 그 놈’의 얼굴을 떠올려야 했다. 오랜 시간 만큼이나 흐릿해진 기억을 다시 또렷하게 만든 건 ‘법최면 수사’였다. 당시 버스 안내양 A씨는 ‘1988년 9월 7일 오후 9시 30분, 화성 팔탈면 가재리에서 수원으로 가는 막차 버스 안’의 시점으로 돌아갔다가 최면에서 깨어났다. 경찰이 들이민 이춘재(56)의 20대 시절 사진은 되살아난 기억 속 그 얼굴과 닮아 있었다.
경찰은 A씨 외에도 화성 사건이 한창이던 때 성폭행을 당한 30대 여성 B씨와 충북 청주에서 성폭행을 당했던 30대 여성 C씨에 대해서도 법 최면 조사를 실시했다. 두 사람은 역시 화성 사건의 수법처럼 당시 성폭행범이 자신의 옷을 사용해 손을 묶었다는 사실과 이춘재와 유사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떠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법 최면을 통해 과거를 떠올린 이들의 구체적인 진술은 이춘재의 입을 여는 데도 한몫한 것으로 전해졌다.
법 최면 수사는 조사자에게 최면을 걸어 무의식에 남아 있는 특정 기억을 끄집어내는 조사 방법이다. 범죄 현장에 사건 해결을 위한 단서가 오직 ‘사람’ 밖에 남아있지 않을 때 주로 쓰인다. 이번 사례처럼 오랜 시간이 지나 망각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피해자나 목격자의 기억이 당시의 공포나 당황스러움, 흥분 등으로 불분명할 때도 최면을 통한 기억 증진법이 활용될 수 있다.
1999년 우리나라 경찰에 도입된 법최면 수사는 현재 각종 강력범죄·성범죄·뺑소니 교통사고 등 다양한 범죄 수사에 활용되고 있다. 경찰청 통계 연보에 따르면, 법 최면이 수사에 활용된 건수는 △2010년 95건 △2011년 73건 △2012년 27건 △2013년 31건 △2014년 35건 △2015년 14건 △2016년 39건 △2017년 23건 등이다. 일정한 양상을 띄지는 않지만, 매년 최소 10여 건 이상의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현재 국내에는 수사기관 소속 60명을 비롯한 총 71명이 법 최면 전문 수사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법 최면, 110도 시야로 본 세상을 45도로 좁혀 다시 기억하게 만든다
최면에 들어가는 순서는 크게 ①하버드 감수성 척도 검사 ②심신 이완 단계 ③기억 퇴행, 맥락 회복 ④사건 관련 기억 회상 ⑤회상 진술 청취 등 다섯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인 하버드 감수성 척도 검사는 조사자의 최면에 대한 감수성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는 단계다. 수사관은 감수성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최면 유도와 암시에 소요되는 시간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그 다음은 신체와 정신을 최대한 편안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단계다. '어렸을 적 좋아했던 장소', '좋아했던 꽃의 향기나 색깔' 등 가장 편안했던 과거의 기억을 연상하도록 유도한다. 이어 "편안해집니다. 편안합니다. 아주 편안합니다" 등의 문장을 읊어주면서 심리적 이완 상태를 유지하게 한다.
편안한 이완 상태가 조성되면, 이제 본격적으로 기억을 특정 과거 시점으로 옮겨갈 차례다. 이른바 ‘기억 퇴행’이다. 전문가는 그 예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하강하는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기법을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당신은 지금 10층에 있습니다. 9층으로 내려왔습니다. 한 층 더 내려가겠습니다. 8, 7, 6, 5, 4, 3, 2, 1." 층수가 내려갈수록 점점 몰입도가 강화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립니다. 무엇이 보이나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과거의 어떤 기억이 눈 앞에 펼쳐진다고 한다.
다음은 좀 더 구체적으로 사건 당시의 상황을 조성하는 ‘맥락 회복’ 단계다. 이때 조사자와 수사관의 구체적인 질문과 답변이 오간다. 가령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조사자가 "거실에 TV, 소파가 보여요"라고 한다면 "소파에 앉으세요. 앞에 뭐가 보이나요?"라고 되묻는 식이다. 수사관은 질문을 이어가면서 조사자가 특정 시점과 장면을 다시 맞닥뜨리고, 그 상황에 대해 묘사하도록 만든다. 최면 도중 듣는 진술만이 전부는 아니다. 수사관은 최면에서 깨어난 뒤 되살아난 기억을 바탕으로 달라진 조사자의 진술을 다시 듣는 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는 이러한 법 최면 과정을 통해서 조사자가 보고자 하는 것을 취사선택해 다시 목격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90도 내지 110도 정도의 시야로 전방을 바라보는데, 법 최면을 통해서는 45도 정도로 좁혀서 보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주변의 사물은 약화시키고, 보고자 하는 곳에는 집중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법 최면을 통해 뺑소니 차량 번호판을 다시 기억하거나, 몽타주 작성이 가능할 정도로 범인의 이목구비나 인상착의를 구체적으로 떠올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뢰해야 '그 기억'까지 갈 수 있다…피해자·목격자에 주로 쓰여
그러나 이 모든 순서의 전제는 최면자와 피최면자 간의 '라포르(rapport·신뢰 관계) 형성'이다. 라포르는 '범죄·심리분석'이나 '협상'에 주로 쓰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법 최면에서도 중요하게 쓰인다. 조사자는 수사관을 믿고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데, 법 최면 자체에 의구심이 들거나 수사관을 믿지 못한다면 조사자는 몰입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 최면 기법은 수사에 협조적인 피해자나 목격자, 참고인에게 쓰이는 것이 적절하다.
혐의에 대해 부인하거나 자신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피의자, 용의자에게 법 최면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한다. 법 최면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최면이 유도되지 않는 특성상, 법 최면 수사는 강제로 진행할 수가 없다. 설령 최면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조사자가 비협조적이라면 사실을 왜곡하거나 허위로 진술할 위험성이 있다. 최면 중에도 대상자는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거나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특성 때문에 최면수사로 확보된 증언 그 자체를 피고인의 유죄 입증 증거로 활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혐의를 부인하는 범인에게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용도로 법 최면을 사용할 수 없는 것도 물론이다. 최면 수사는 기억에서 찾아낸 단서를 기초로 다음 단계의 수사를 진행해 다른 증거들을 찾아내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예로 뺑소니 피해자가 최면을 통해 기억해낸 번호판이 ‘서울 XX 583X’였다면, 경찰은 다음 수사단계에서 이 번호에 해당하는 차종들을 추려 용의자를 좁히는 데 활용하는 식이다.
◇'용의자'인 이춘재에게도 법 최면 쓰일까…"자백했다면 상황 달라"
그러나 용의자나 피의자라고 해서 법 최면이 전혀 활용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자백한 용의자'라면 상황이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피의자나 용의자가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에서 당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 협조적인 경우라면 극히 제한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경찰이 현재 이춘재에게 법 최면 기법을 적용해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수사 초기 자신의 혐의를 줄곧 부인하다가, 9차례의 대면조사 끝에 "자신이 10건의 화성사건 외에도 살인 4건과 30여 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경찰은 이 진술의 신빙성을 검토하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약 30년의 세월이 흘러 이춘재의 기억이 흐릿해졌고, 이춘재의 것과 일치하는 DNA가 검출된 4·5·7·9번째 화성 사건처럼 유류품이 제대로 보존돼있지 않은 경우도 많아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이춘재의 기억을 구체화해 검증하는 일이 필요해진 셈이다.
법 최면 수사 전문가인 이태현 경찰수사연수원 과학수사학과장(경위)는 "이춘재가 이전처럼 혐의를 부인하지 않고 자백한 상황이라면 상황이 다르다"면서 "본인이 자백한 살인이나 성범죄 사건들의 시점이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게 만들기 위해 법 최면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