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인생은 환대보다 거절에 익숙했다. 고1 때 찾아간 야구부에선 "너무 늦었다"며 퇴짜 놓았다. 공장에서 금형 기술자로 일했지만 야구공이 아른거렸다. 사회인 야구, 독립 리그 전전하며 프로 무대를 꿈꿨다. 이번엔 '학창 시절 야구부를 안 거친 비(非)선수 출신은 프로 선수로 뽑을 수 없다'는 KBO(한국야구위원회) 규정이 발목 잡았다. 꿈은 매번 도망갔다.

도전보다 포기가 힘들었다. 야구부가 거부하니 오합지졸 동네 야구팀을 꾸렸다. 비선수 출신 규정에 가로막히자 국가인권위원회까지 찾아갔다. 하나씩 벽을 부숴나갔다. 그러길 10년. 마침내 꿈이 항복했다.

지난 6월 25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SK와이번스와 LG트윈스 경기. 8회 초 등번호 40번을 달고 LG트윈스 투수 한선태(25)가 마운드에 올랐다. 한국 프로야구 38년 역사상 최초로 비선수 출신이 1군 무대에 데뷔하는 순간이었다. 돌연변이 미생(未生)의 출현에 상대팀 팬까지 환호했다. 중계 해설진도 속마음을 드러냈다. "편파 중계 하면 안 되는데… 모두 이 선수가 잘됐으면 하실 겁니다."

사회 곳곳 '그들만의 리그'가 판치는 요즘 '빽'도 돈도 없던 '무(無)스펙' 청년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지난달 말 경기도 이천에 있는 LG트윈스 2군 경기장 LG챔피언스파크로 향했다. 한선태는 1군에 데뷔해 여섯 경기 등판 후 7월 12일 2군으로 내려갔다. 2주 뒤 1군에 복귀했지만 사흘 만에 다시 2군으로 내려갔다. 골반이 조금 불편해 훈련을 쉬며 1군 복귀를 노리고 있었다.

젊어서 흘리지 않은 땀은 늙어서 눈물로 나온다

모자와 야구공을 들고 한선태가 나타났다. 모자 안쪽, 손으로 삐뚤빼뚤 '하면 된다'고 쓴 글씨가 보였다. 첫 등판 마지막 아웃카운트 때 던졌다는 공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젊어서 흘리지 않은 땀은 늙어서 눈물로 나온다.' 최일언 투수 코치가 데뷔 기념으로 써준 글이랬다. "원래 맨 처음 던진 공을 기념으로 간직한대요. 어찌나 떨었는지 초구에 폭투 던지는 바람에 공이 사라져 버렸어요. 볼보이가 주웠으려나, 배팅 박스에서 잠자고 있으려나. 하하." 한선태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해맑게 웃었다.

―최 코치 말을 빌려 봅니다. 늙어서 눈물로 나올 땀이 많습니까?

"늙어서 눈물 안 흘리려고 지금 열심히 땀 흘리고 있습니다." 한 박자 쉬고 말을 이었다. "아, 그동안 눈물 젖은 빵 참 많이 먹었습니다. 2016년 군대 전역하고 편의점 '알바'로 한 달에 50만원 벌며 사회인 야구를 했습니다. 일 끝나면 편의점 아래 레슨장에서 연습하고 구석에서 잤어요. 2017년 독립 야구단 '파주 챌린저스'에 들어갔을 땐 아버지께 매달 회비 90만원(회비로 야구단 운영비를 충당한다)만 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상자 접기, 택배 알바로 생활비 벌며 야구 했습니다."

―아버지가 선뜻 도와줬습니까.

"아버지께 난생처음 부탁해 봤습니다. 저희 집 형편에 적은 돈이 아닌데 선뜻 내주시더군요. 어떻게 번 돈인지 아니까 아버지 위해서라도 목숨 걸고 해야겠다 마음먹었습니다." 아버지는 활어 배달 일을 한다. 초등학교 때 부모가 이혼했고, 조부모가 그를 키우다시피 했다.

―야구 하고 싶어 국가인권위까지 갔다고요?

"파주 챌린저스 시절 투구폼을 바꾸고 사이드암으로 구속이 시속 144㎞까지 갔어요. 제게 관심 있는 프로 구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KBO 규정상 비선수 출신은 프로에 입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학생 야구 선수로 6년간 등록되지 않은 선수는 드래프트 자격이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억울해서 금요일 오전 연습 제쳐 두고 인권위에 갔습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힘닿는 데까지 벽을 두드리고 싶었습니다." 상담사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 아닌가, 불공평하다" 하소연했다. 조사관이 배정됐는데 일주일 뒤 "당장 바꾸기 어렵다"는 답이 왔다.

―프로 길이 막힌 거군요.

"그만두려 했습니다. 그때 일본에선 프로 구단이 사회인 야구 출신도 데려간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파주 챌린저스를 관두고 2017년 11월 오사카에서 열린 일본 독립 야구단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습니다."

생애 첫 해외여행. 여비가 부족했다. 군대 월급에서 4만원씩 떼 적금 부어 전역 때 샀던 80만원짜리 글러브까지 팔았다. 겨우겨우 130만원을 모아 일본으로 갔다. 마침 독립 구단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에 있던 김무영 투수 코치 눈에 띄어 계약을 맺었다.

모자 안쪽에도 ‘하면 된다’고 적혀 있다.

―결국 LG 트윈스에 입단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2018년 비선수 출신도 입단할 수 있게 KBO 규정이 바뀌었습니다. 제 인권위 청원이 영향을 미쳤다고 들었습니다. 덕분에 작년 프로 구단 해외파 트라이아웃에 참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마침 (이)대은이 형, (이)학주 형, (하)재훈이 형이 한꺼번에 참가해 화제가 됐어요. 가나다순으로 제가 마지막에 던졌습니다. 스카우트들이 재훈이 형까지 보고 가려고 했다가 제가 사이드암으로 시속 145㎞까지 던지니 '쟨 뭐지' 했답니다." 신인 2차 드래프트 전체 95번으로 LG가 그를 지명했다.

―첫 등판 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한선태 잘 버텼구나, 기특하다 했습니다. 사실 저는 무모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인생 다 걸고 야구만 봤으니까요."

―1군 맛을 봤습니다. 더 가고 싶을 텐데요.

"정말 배고팠을 때 라면 국물 딱 한 번 먹은 느낌이랄까요. 먹어 보니 진짜 맛있어서 계속 먹고 싶고, 밥 말아서도 먹고 싶은 느낌. 안 갔을 땐 몰랐는데 가보니 더 가고 싶습니다."

전직 반월공단 금형 기술자

―어렸을 땐 야구에 관심이 없었습니까.

"야구를 몇 명이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2009년 중3 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열풍이 불었어요. 국어 시간에 한·일 결승전을 단체로 봤습니다. 막판에 이치로한테 맞긴 했지만 임창용 선배님 투구가 정말 멋있는 거예요." 꿈틀꿈틀대며 포수 미트로 훅 빨려가는 임창용의 '뱀 직구'가 소년의 가슴을 휘저었다. 야구에 빠진 친구와 캐치볼을 시작했다.

―실업고(부천공고)로 진학했던데요.

"친구와 캐치볼 하려고 같이 실업고에 지원했습니다. 인문계는 '뺑뺑이'라 같은 학교로 못 갈 수도 있었거든요."

고1 때 야구가 너무 하고 싶어 옆 학교인 부천고 야구부를 찾아갔다. 마지못해 테스트 날짜를 주면서 감독이 말했다. "비 오면 오지 말고, 비 안 오면 와 보든지." 테스트 날 아침, 하늘이 말짱했다. 운동장으로 갔더니 감독이 반대편에서 신호를 줬다. 영문 몰라 멀뚱멀뚱하게 서 있었다. 알고 보니 주력 테스트 신호였다. 결과는 뻔했다. "야구 하기에 너무 늦었다. 그냥 학교나 열심히 다녀라."

―그런데도 야구를 안 접었습니까?

"친구랑 동네 야구팀을 만들었습니다. 운동장에서 공 차던 초등학생들까지 불러왔습니다. 하아, 그거 쉽지 않았습니다." 첫 1군 등판 날, 이제는 20대가 된 동네 야구팀 '초딩' 동생들이 관중석에서 목 터져라 외쳤다. "선태 형, 파이팅!"

―실업고로 갔으면, 취직도 했습니까.

"고3 때 반월공단에 취직했습니다. 자동차 외형 만드는 금형 공장이었는데 넉 달 동안 다녔어요. 저 나름대로 재밌게 일했습니다. 반장님이 예뻐해서 4개월 차엔 못 만지는 기계도 만지게 하셨죠. 프로는 됐고 사회인 야구나 할까 했는데 친구가 독립 야구단 '고양원더스'에 지원해보자더군요. 공장장님한테 말하고 테스트 보러 갔는데 떨어졌어요."

그 무렵 대전에서 리틀야구 하는 지인이 밥값만 가지고 내려오면 야구를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공장을 관두고 한동안 대전에 내려가 있었다. 2014년 세종대 평생교육원에서 비선수 출신 야구부를 만든다 해서 들어갔다. 원하던 방향이 아니라 한 학기 만에 관두고 입대했다.

“어렸을 때 야구부 했으면 프로 선수가 못 됐을 겁니다. 매 맞는 걸 못 견뎠을 것 같거든요(웃음).” 선수 3년 차. 한선태는 늦게 시작했기에 지금도 야구가 정말 재밌다고 했다. 늘 웃는 표정이었다.

모두가 응원하는 무(無)스펙 사나이

―1군 데뷔 날이 마침 6·25더군요.

"원래 (정)우영이가 시구 교육 담당이었는데 제가 갑자기 하게 됐습니다. 시구자가 참전 용사분들이었어요. 15사단 수색 대대 출신이라고 하니 '군대 갔다 왔어? 힘든 데 갔다 왔네' 하며 기특해하셨습니다." 그날 팀이 3대7로 뒤진 8회 등판해 1이닝 1피안타 무실점, 최고 구속 시속 144㎞를 기록했다.

―카메라에 잡힌 중년 남녀가 제 일처럼 펄쩍 뛰며 기뻐해서 해설자가 한 선수 부모님으로 착각했었다죠.

"그날 아버지는 당구장에서 친구들하고 보셨습니다. 경기 끝나고 지하철 타고 집에 갔는데 아버지가 집 근처 지하철역(역곡역)으로 마중 나왔어요. '그 아줌마·아저씨 누구냐? 우리 아들 뺏기겠더라' 하셨지요." 운전면허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한다고 했다. "술도 못 먹지만, 운전을 못 하니 음주 운전으로 사고 칠 일은 없습니다(웃음)."

―반응이 그토록 뜨거울 거라 예상했습니까.

"상상도 못 했습니다. SNS로 메시지가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절망적인 상황인데 제 얘기 보며 마음 다잡았다는 분, SK 팬인데 첫날 제 투구 때 자기 팀이 병살 치라고 기도했다는 분…. 그중 '10개 구단 팬이 응원하는 선수'라는 말이 제일 좋았습니다."

―한 야구 전문가가 "ABC도 안 배웠는데, 영어로 박사 논문 쓰는 격이다. 기적이다"라고 하더라고요. 일찍 시작했으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학교 야구를 안 해서 프로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팀 형들이 저한테 '빠따 맞아 봤느냐'고 묻기에 '숙제 안 해서 회초리만 맞아 봤다'고 했더니 배꼽 잡더라고요. 맞고 배웠다면 지금처럼 못 즐겼을 겁니다. 야구 하는 걸 하도 즐거워하니 동료들이 가끔 선수 몇 년 차냐고 물어봐요. 3년 차(파주 챌린저스부터)라고 답하면 '한창 야구 재밌을 때네. 나도 3년 차 때 그랬지, 초등학교 때'라고 합니다. 하하." 또 웃는다.

―원래 잘 웃습니까?

"그냥 하루하루 재밌게 지내려 합니다. 박용택 선배가 부상으로 2군에 내려와 있을 때 제가 웃는 걸 보더니 그랬습니다. '야구장에서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 선수 본 것도, 내가 그렇게 웃어본 것도 언제였나 싶다. 그 웃음 잃지 말고 즐겨라.'"

한선태는 선수들 사이에서도 연구 대상이다. 경기 끝나고 상대 더그아웃에 인사 가면 '공 좋더라'고 꼭 덕담해준단다. 외롭진 않을까. "동료들 보니 어렸을 때부터 야구 한 사이라 다른 팀 선수까지 다 알더군요. 저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제 겨우 우리 팀 선수 이름은 다 외웠습니다."

일본 독립 구단 도치기 골든 브레이브스 시절.

―독립 구단하고 분위기가 많이 다른가요?

"거기(독립 구단)나 여기(프로)나 노력하는 건 같습니다. 거기는 돈 내고 노력하고, 여기는 돈 받고 노력하는 게 차이죠."

―운동선수보다 뒷바라지하는 부모가 더 힘들다고들 하더군요. 한 선수 가족은 어땠습니까.

"노 터치. 굳이 터치한 거라면 할머니가 저녁밥 먹기 전까지는 들어오라고 한 것 정도? 아버지는 야구장 근처도 안 와보셨습니다. 작년에 시즌 마지막 잠실구장 홈경기가 끝나고 신인 선수를 소개한 적이 있었습니다. 구단에서 부모님들을 초대했는데 그때 아버지가 처음으로 야구장 구경을 하셨어요."

―늦게 배우니 뭐가 좋던가요.

"일단 돈이 안 들었습니다(웃음).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시키려면 기둥뿌리 빠진다는데, 저는 파주 챌린저스에 있던 여섯 달 동안 매달 90만원씩 총회비 540만원 낸 게 전부입니다. 남들은 이미 스케치북이 가득 채워진 상태라면 저는 백지상태입니다. 금방 흡수합니다. 어릴 땐 반복 훈련해서 몸으로 먼저 익히지만, 커서 배우면 머리로 이해부터 하고 몸이 따라옵니다. 배우는 속도가 더 빠릅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으면 소용없지 않습니까.

"솔직히 재능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운동선수 되려고 어렸을 때부터 혹사할 필요가 없다고 보나요?

"저야 결과적으론 늦게 알아 잘됐다 싶지만 케이스마다 다르겠죠. 다만 사회인 야구 할 때 선수 출신 형들이 그랬어요. 자기들은 학창 시절 한 게 야구밖에 없다, 돈 벌 수 있는 길이 야구밖에 없으니까 이 악물고 도전한다고. 그런 사람들이 프로에 들어와 받는 돈과 제가 뒤늦게 야구 배워 받는 돈의 무게는 분명 다르다고 봅니다. 공고 때 컴퓨터응용밀링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제게 기술 자격증이 있다면 형들에겐 '야구 기술자' 자격증이 있는 셈 아닐까요. 야구를 전공한 이들이 야구 하며 느끼는 압박감은 저보다 훨씬 더할 겁니다."

―7전 8기, 도전의 아이콘이 됐습니다. 그 사이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요.

"모두가 포기하라 했습니다.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의 한선태는 없습니다. 내 인생은 남이 살아주지 않는다, 타인의 의견은 참고 사항일 뿐 선택은 내 몫이다, 휘둘리지 말고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제가 얻은 교훈입니다."

―다음 꿈은 뭔가요.

"LG 트윈스 우승." 직장 생활에 너무 빨리 적응한 것 아니냐고 물었다. 멋쩍어하며 한선태가 고쳐 말했다. "LG 트윈스 우승, 그때 제가 1군으로 뛰는 겁니다."

마운드에서 타석까지 거리는 18.44m. 한선태 전에, 이 길에 오르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한선태가 보여줬다. 인생의 내비게이션에 최적 경로란 없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