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등급제 진짜로 폐지하라." "장애인 고려장 중단하라."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 장애인 등 40여명이 16일 오후 5시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국민연금 사옥 앞에서 이렇게 외치더니 8차선 도로를 점거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회원들이었다. 이들은 "오는 21일부턴 1박2일 투쟁 집회를 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달 '장애등급제'를 31년 만에 폐지하고 장애인 복지 예산도 늘렸다. 장애등급제 폐지는 장애인 단체의 숙원이었고, 문 대통령으로서도 이를 2017년 대선 공약으로 내건 뒤 약속을 이행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애인들은 반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또 다른 대선 공약인 '주 52시간제' '최저임금 인상' '치매국가책임제' 등의 영향으로 장애인들이 실제로 받는 복지 혜택은 오히려 줄어들 전망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복지 공약끼리 서로 충돌한 탓에, 예산을 더 들이고도 효과는 오히려 축소된 것이다.
문 정부는 장애 정도에 따라 1~6등급으로 분류하고 복지 서비스 이용·탈락 여부를 결정하던 장애등급제를 변경, 중증(기존 1~3급)과 경증(4~6급)으로만 나누기로 했다. 그러면서 기존 1~3급 장애인에게만 제공하던 목욕·외출 등 '활동 지원 서비스'(도우미 서비스)를 모든 장애인으로 확대한다고 했다. 이를 위한 올해 예산도 1조35억원으로 작년(6907억원)보다 45% 늘려 잡았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가장 큰 원인은 인건비 상승이다. '장애인 활동 지원 서비스' 비용은 사실상 도우미 인건비다. 이것이 1만760원에서 1만2960원으로 20.5% 올랐다. 반면 서비스를 받아야 할 사람은 7만1000명에서 8만1000명으로 14.1% 늘었다. 전장연 관계자는 "최저임금 인상과 지급 대상 증가로 OECD 평균 수준에 맞추려면 지금보다 6조원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치매국가책임제'도 장애인 복지에 타격을 줬다. 정부는 제도를 통해 몸이 불편한 만 65세 이상 노인이 장기요양보험 지원을 받는 기준을 대폭 완화하면서, 웬만한 중증 장애인도 기존 활동 지원 서비스 대신 혜택이 더 적은 장기요양보험으로 자동 편입시켰다. 하루 24시간 내내 무료로 돌보미의 보살핌을 받던 중증 장애인이, 65세 이후에는 최대 4시간밖에 돌보미를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 생긴 것이다.
장애인 단체들은 문 정부 정책에 대해 "예산 반영 없는 단계적 사기"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장애인 활동 지원 금액 수준을 결정하는 종합조사 배점 기준까지 조작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장애 정도가 심해 종합조사에서 최고 점수를 받으면 한 달 최대 480시간 서비스를 받는다. 그러나 전장연 측은 "배점 기준이 바뀐 뒤 최고 점수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며 "2520명 중증 장애인 대상 새 종합조사표를 모의 평가해 본 결과, 30%는 활동 지원 시간이 전보다 감소했고 7%는 활동 지원 급여 수급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중증 장애인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고 있다"고 했다. 한 장애인 가족은 "사지마비 중증 장애인 1급인 60대 아버지가 혼자 대소변도 식사도 해결하지 못함에도 전보다 지원 시간이 줄어들어, 집안 돈으로 활동 지원 서비스를 쓰려니 너무 힘들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공약 충돌이 "보여주기식 행정의 결과"라고 말한다. 오승환 한국사회복지사협회 회장은 "스웨덴 등 해외 북유럽형 복지 국가들은 복지 공약 예산 계획을 촘촘히 짠다"며 "장애등급제 폐지는 장애인 관련 대선 공약 1호였음에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무늬만 그럴 듯한 제도가 됐다"고 했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관계자는 "더도 말고 필요한 만큼만 제대로 받겠다며 요구한 등급제 폐지를 예산 고민 없이 해 다 같이 기존보다 덜 받게 생겼다"고 했다.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장애인 문제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우리 사회 분위기가 정부 정책에도 반영된 것 같아 씁쓸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