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4주년이건만 일제의 상흔은 아직도 말끔하게 아물지 않고 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는 아물기는커녕 오히려 덧나고 있다. 더구나 그동안 우리가 아예 몰랐거나 은연중에 외면해온 상흔도 적지 않다. 그중에 하나가 조선인 전범(戰犯) 문제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에 조선인이 전범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많은 조선인들이 전범으로 처벌을 받았다. 관련자 증언을 바탕으로 이런 기막힌 사연을 고발한 것이 바로 우쓰미 아이코의 ‘조선인 BC급 전범의 기록’(朝鮮人 BC級 戰犯の記錄·1982)이다.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잘못을 통감하고 이 문제를 파헤친 양심적인 일본인 학자다. 우리말로는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2007)이라는 제목으로 뒤늦게 소개되었다.

종전 당시 전쟁범죄는 A·B·C급으로 나뉘었다. A급 전범은 전쟁을 주도한 수뇌급이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고 실제로 처형된 사람은 7명뿐이었다. 나머지는 미국의 일본 재건 방침에 따라 대부분 풀려나 실제로 전후 일본 재건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A급 전범 다음으로, 수족 역할에 해당하는 B급, C급 전범이 있었다. B·C급은 국제법 조문에는 구분되어 있었으나 현실적으로는 거의 구분 없이 뭉뚱그려 B·C급 전범으로 다뤄졌다.

이런 B·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은 일본을 포함해 아시아 각지 49곳에서 각각 열렸다. 거기서 57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고, 948명은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그중에 조선인 전범도 148명(사형 23명)이나 포함되었다. 군인은 3명뿐이었다. 그리고 통역 담당이 16명이었다. 나머지(유죄 129명, 사형 14명)는 모두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이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감시원 출신 조선인 전범들의 증언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일제는 1942년 8월 백인 포로 약 1000명을 조선으로 데려왔다. 부산, 인천, 서울 등지에서 거의 20만명이 백인 포로들의 행렬을 보기 위해 몰려나왔다. 일제는 이 이벤트를 “조선인이 품은 영·미 숭배관념을 없애고, 식민지하의 사람들을 황국신민화시키는” 데 이용하려고 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동남아시아로 보낼 조선인 포로감시원을 모집할 계획도 구체화시켰다.

모집인원은 총 3000명이었다. 그들은 형식상 ‘자발적’ 지원을 통해 선발된 군속용인(軍屬傭人)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군마(軍馬)나 군견(軍犬)보다 못한 존재로 무시를 받았던” 포로감시원들 중에 무려 129명(전체의 4.3%)이나 전범이 되었다. 그것은 아시아 각지에서 악명 높았던 헌병 중 전범 비율(4.3%)과 같은 수준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까.

그들은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었다. 대부분 일본인 군인이 책임자로 있는 각급 수용소에서 포로들을 직접 관리하는 말단에서 일했다. 당시 일본군은 포로가 되는 것을 최대 수치로 여겼다. 반면 연합국 군인에게 포로는 전력을 다해 싸운 명예로운 존재였다.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 포로 관리 현장에서는 마찰이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 군대의 억압적 통제는 악명 높다. 억압은 보다 낮은 사람, 즉 약자를 향해 아래로 전가되어 간다. 조선인 감시원은 그 억압 기구의 말단에 서 있었다. 그들 밑에 ‘황군이 목숨을 걸고 포획한 포로’가 있었다. 감시원들이 국제법을 인지하고 포로들을 ‘명예롭게’ 대했을 리가 없다. 그들에게 그런 처신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의식주나 의료를 비롯해 포로들에 대한 모든 대우가 국제법 위반이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굶주림으로 영양실조에 걸렸다. 이런 상태에서 콜레라 등 전염병이나 풍토병에 쉽게 감염되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포로들을 철도, 비행장, 도로 건설 등에 무차별적으로 내몰았다. 그 와중에 그들을 최일선에서 직접 대면하며 관리하는 것이 조선인 감시원들의 임무였다.

조선인 감시원들은 혼자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백 명 넘게까지 포로를 관리해야 했다. 그것도 단순한 관리가 아니었다. 멀리 떨어진 밀림 속 공사장까지 포로들을 인솔해 가서 그들의 숙식을 뒷바라지해야 했다. 의식주 등 모든 조건이 엉망이었다. 환자와 사망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상부의 지시에 맞춰 무조건 포로들을 공사판에 동원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기면 폭언과 폭력이 쏟아졌다. 감시원들의 스트레스도 포로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동남아시아의 연합국 포로들은 수감 중에 무려 27%나 사망했다. 같은 기간 유럽에서의 포로 사망률은 불과 5%도 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종전 후 연합국은 동남아시아의 포로 대우 문제를 무엇보다 중대한 범죄로 여겼다. 그들은 조선인 감시원을 포함해 포로수용소 관계자들을 대거 구금하고, 포로들의 증언이나 대면 식별을 통해 전범을 가려냈다. 포로들을 직접 윽박질렀던 말단의 조선인 감시원들이 고스란히 연합국 포로들의 지목을 받게 되었다.

조선인 감시원들은 종전 후 혼란을 틈타 얼마든지 도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전범이라는 인식 자체가 아예 없었다. 일부는 자발적으로 연합국의 업무에 협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혼란기에 아무도 식민지 청년들의 딱한 사정을 세심하게 고려해주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을 옹호해줄 조국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무도한 포로 학대자일 뿐이었다.

결국 12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중에 14명은 끝내 처형까지 당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도 짧게는 수년, 길게는 10여년 동안이나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1957년이 되어서야 모두 풀려났다. 그들은 조국으로부터도 전범 또는 일제 협조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래서 풀려나 귀국했다가 자살한 사람도 있고, 일본으로 다시 되돌아간 사람도 있다.

더구나 참전할 때는 일본 황민이었으나, 전후에는 일본 국적이 상실됐다. 이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원호보상을 하지 않았다. 정말 기막힐 노릇이다. 이처럼 그들은 한·일 두 나라로부터 모두 버림을 받은 신세가 되었다. 자살자나 정신이상자가 속출하고, 삶 자체가 망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석방되고 나서가 진짜 전쟁이었다”고 회고한다.

우리도 반세기 이상 이 문제를 방치하고 외면했다. 겨우 2006년이 되어서야 우리 정부가 그들을 ‘피해자’로 공식 인정했다. 너무나 지당한 결정이다. 자손들과 일부 생존자들은 이 결정에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명예회복이든 보상이든 배상이든 우리 정부가 더욱 전향적으로 나서야 마땅하다. 위안부에 대해서든 강제징용자에 대해서든 마찬가지다.

우리 국민들로 하여금 비참한 고초를 겪게 한 책임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있다. 하지만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우리나라의 책임은 더욱 엄중하다. 더구나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를 반성할 만한 내적 조건을 갖추지 못한 불량국가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 오로지 일본의 반성이 우리 과거사의 매듭을 푸는 결정적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계속해서 일본의 반성을 촉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는 과거사 문제에 올바르게 대처해왔는지 겸허하게 돌아보는 일이다. 우리 과거사의 매듭을 푸는 주체는 결코 일본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다. 설사 일본이 전향적으로 나서더라도 그 주체는 여전히 우리인 것이다.

- 더 많은 기사는 주간조선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