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청, 도심에 '노 재팬' 깃발 내걸어
시민들 "정부가 日 관광객 다 막나…官 주도 안돼" 비판 쏟아내
중구청장 "대통령도 최전선서 싸우는데… 관군·의병 따질 때냐" 반박
논란 커지자 뒤늦게 철거…"시민 우려 존중" 사과
서울 중구청이 6일 서울 도심에 ‘노 재팬(No Japan)’ 깃발을 내걸었다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나서 ‘관제 반일 운동’을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커지자 5시간여 만에 철거했다.
중구는 이날 "광복절인 오는 15일까지 퇴계로, 을지로, 태평로, 동호로, 청계천로, 세종대로, 삼일대로, 정동길 등 22개 거리에 태극기와 함께 ‘노 재팬 깃발’ 1100개를 내걸겠다"고 밝혔다.
중구는 첫 단계로 이날 오전 10시쯤부터 서울 대한문 앞 도로 등에 깃발 50개를 태극기와 함께 내걸었다. 노 재팬 깃발은 지난달부터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쓰인 ‘보이콧 재팬’ 이미지로 만들어졌다. 가로 70㎝, 세로 200㎝ 크기로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중구청은 이날 오후 남대문 일대 도로에 깃발을 거는 등 15일까지 차례로 서울 도심에 깃발 1100개를 내걸 계획이었다.
더불어민주당 소속인 서양호 중구청장은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 우대국)'에서 제외한 데 대해 항의하는 차원"이라며 "중구는 서울의 중심이자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오가는 지역으로, 전 세계에 일본의 부당함과 함께 이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 "日 관광객 다 막을 거냐" "지자체가 유치하게 시민 선동" 비판 쏟아져
중구청의 '노 재팬 깃발'을 내걸자 거센 찬반 논란이 일었다. 깃발 설치를 지켜보던 변모(57)씨는 "(한국)경제를 망치려는 일본의 의도를 아는데 이런 대응은 당연히 필요하다"며 "지금 모습이 일제 강점기와 똑같은 것 같다. 일본에게 당하는게 싫고, 구청에서 적절한 대응을 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일본 제품 불매 운동에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쏟아졌다. 대한문 앞 커피 가게에서 일하는 한모(36)씨는 "일본 관광객이 저 깃발을 보고 가게에 들어와 소비를 하겠느냐"며 "지자체가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유치하게 시민들을 선동하는 셈"이라고 했다.
깃발 설치를 바라보던 윤모(60)씨는 "일본 보이콧에는 동의하지만 관에서 주도하는 걸로 보일까 봐 우려된다"며 "관광객들도 오는데 굳이 눈살 찌푸리게 할 필요는 없는 거 아닌가. 일본은 결국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했다.
중구청 홈페이지에도 노 재팬 깃발 게양에 항의하는 글이 잇따랐다. 한 네티즌은 "불매운동은 국민이 한다. 공무원이 나서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또 다른 네티즌들은 "이런 사업은 일본인 관광객에게 불안감 조성을 할 뿐이다. 취소했으면 좋겠다" "관광객들 다 막을 생각이냐. 소상공인 다 죽는다"는 의견을 올렸다.
청와대 국민청원도 등장했다. 이날 청원게시판에는 ‘서울 한복판에 노 재팬(No Japan) 깃발을 설치하는 것을 중단해 달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자는 "서울 중심에 저런 깃발이 걸리면 일본 관광객들이 불쾌해 할 것이고 일본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할 것"이라며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불매운동을 정부에서 조장하고 있다는 그림이 생겨 향후 정부의 국제여론전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이 청원은 이날 오후 3시 30분 현재 1만 6600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동의했다.
그러자 서 구청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지금은) 관군, 의병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면서 "왜 구청은 나서면 안 되는 것이며, 왜 명동이면 안 되느냐.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대통령조차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고 국회에서는 지소미아(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파기가 거론되는 지금이야말로 민관 합동 벤치 클리어링이 필요한 때"라고 밝혔다. 그러나 논란이 커지자 서 구청장은 이날 오전 이 글을 삭제했다.
◇ 중구, 오후 회의 거쳐 철거 결정…"불필요한 오해 우려 겸허히 수용" 사과
중구청은 이날 오후 서 구청장 주재로 회의를 열고 '노 재팬 깃발'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설치 5시간여 만인 오후 3시쯤부터 깃발을 철거했다.
서 구청장은 "여러 시민의 우려 사항을 존중한다"며 "오늘 중 현재까지 설치된 50개 깃발을 모두 내리고, 추가 설치를 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밝혔다.
서 구청장은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에 국민과 함께 대응한다는 취지였는데 뜻하지 않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 게첨이 일본 정부와 일본 국민을 동일시해 일본 국민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우려와 불매운동을 국민의 자발적 영역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했다.
그는 "일본 정부의 부당한 조치를 향한 우리 국민들의 목소리가 다시 하나로 모여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이유 불문하고 설치된 배너기는 즉시 내리겠다"고 했다.
숭실대 철학과를 졸업한 서 구청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을 지냈다. 서울시 교육청 교육자치특별보좌관직을 맡던 중 지난해 지방선거에 출마해 서울 중구청장에 당선됐다.
아래는 당초 서양호 중구청장이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삭제한 입장문 전문
관군, 의병 따질 상황이 아닙니다. 왜 구청은 나서면 안 되지요? 왜 명동이면 안 되나요? 일에는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먼저 중구의 시내 중심에 NO재팬 현수기 게첨 계획과 관련해 주신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생각은 다를 수 있기에 존중합니다. 저의 다른 생각도 존중해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본 정부가 우리나라에 가한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 전인 초기 반한발언 하던 시기에는 이런저런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정부의 외교적 노력과 시민들의 불매운동이라는 압박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병행해서 일어났고, 민과 관의 역할분담이라는 측면에서도 외교전략상 필요했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지금은 화이트리스트 배제조치라는 경제보복 즉, 경제판 임진왜란이 터져서 대통령조차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고 국회에서는 지소미아 파기가 거론되는 비상한 때입니다.
한일 야구전에서 일본 투수의 빈볼에 부상당한 한국타자가 항의하는 것을 길 건너 불구경 보듯이 `선수는 실력으로, 항의는 응원단이' 라는 주장은 논리적으로도 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일본 정부의 반칙에 민관합동으로 벤치 클리어링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런 판국에 정치인과 지방정부는 빠져야 하고 순수한 의병만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수많은 국민은 물론 정치인과 150여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이 싸움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전쟁 중에는 관군, 의병의 다름을 강조하기보다 우선 전쟁을 이기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쟁후에 왜 의병까지 나서게 되었는지 평가 반성하는 것입니다. 이미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관군과 의병을 가르는건 지나친 형식논리이고 한가해 보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일본 대응을 놓고 진보ㆍ보수의 입장이 다른 당파간의 싸움도, 애국하는 마음으로 하는 몸에 좋은 입바른 말도 전쟁전에 했어야 했고, 지금은 화살 한발이라도 아껴서 전쟁에 써야 할 때가 아닌지요? 일은 다 때가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국민들이 일본정부와 일본국민을 구별못해 NO 재팬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폄훼하는 것이나, 지방정부가 반일 구호만 외치지말고 중소기업 대책마련 등 종합적 대응은 하지 않을것이라는 단정은 지나친 오만이 아닐까 싶습니다. 싸움을 단순하게 해석해서 많은 사람들이 쉽게 참여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오랜 경험칙의 지혜입니다.
끝으로 일에 있어서 때 못지 않게 장소도 중요한데 비정규직 문제, 폭염 대응을 올린 개인 SNS나, 변두리는 되고 명동 시내는 안 된다는 논쟁도 썩 좋은 선택지는 아닌 듯 합니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대통령과 정부가 향후에 있을 협상과 외교에서 쓸 수있는 카드를 여러장 만드는 것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때까지 중구의 현수기는 대장기를 지키며 국민과 함께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