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 나무는 이름이 뭐야?" "삼나무야. 진짜 키 크지?"
지난달 31일 제주시 사려니숲길에서 정디모데(8)군이 울창한 삼나무 사이를 신나게 뛰어다녔다. 아빠 정성훈(49)씨가 땀을 뻘뻘 흘리며 아들을 쫓아다니다가 쑥스럽게 웃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행을 많이 다니던데, 우리 가족은 부끄럽지만 이게 아이와 함께한 첫 여행입니다. 아이가 가족 그림에 '첫 나들이'라 써 달라더군요. 평소 TV를 보며 '아빠 여기 가자' '저기 가보자' 했는데, 이제야 데려온 게 미안할 뿐입니다."
정씨 가족은 지난달 29일 경기도 성남 집에서 출발해 비행기를 타고 3박4일 일정으로 제주도에 왔다. 제주 목장에서 말을 타는 것도, 아쿠아리움에서 물고기를 보는 것도 정 군에겐 하나하나가 모두 '인생 첫 경험'이었다.
그동안 정씨 가족이 여행할 엄두를 못 낸 건 아빠 정씨가 33년째 혈액 투석을 하는 만성 신장병 환자라서다. 정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급성 신우신염을 앓은 뒤 신장이 망가져 고1 때부터 매주 세 차례 혈액 투석을 하고 있다. 이번 여행 전까지 그가 집 밖에서 가족과 잔 건 2001년 아내 최경자(50)씨와 함께 떠난 제주도 신혼여행뿐이다. 아내 최씨는 "여행 내내 남편 상태가 안 좋아 그때 이후 여행은 지우고 살았다"고 했다.
국내 혈액 투석 환자는 2010년 3만9509명에서 2017년 7만305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이론적으로는 이들도 여행 중간에 인근 병원을 찾아 투석을 받으면 된다. 그러나 환자 대부분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다. 병원별로 쓰는 약이 달라 낯선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어쩌다 받아주는 병원을 찾아도 몇 시간씩 기다려 투석을 받고 나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다.
정씨 가족의 이번 여행을 가능하게 해준 게 '제주 라파의 집'이다. 2007년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가 혈액 투석 환자를 위해 서귀포시에 세운 방 54개짜리 숙박 시설이다. 겉보기엔 평범한 숙소지만 이곳에는 다른 국내 최고급 리조트에도 없는 게 있다. 혈액투석기 21대를 갖춘 '사랑의 의원'이다. 의사 1명과 간호사 5명이 근무한다.
이곳 투숙객 김해겸(72)씨는 "바쁘게만 살다 은퇴 후 '이제 여행 좀 다녀보나' 했더니 4년 전부터 투석을 시작하게 됐다"면서 "라파의 집 덕분에 은퇴 후 여행하며 사는 즐거움을 되찾았다"고 했다. 또 다른 숙박객 이모(38)씨도 "젊은 나이에 투석을 시작하면서 '이제 여행은 끝인가' 했는데, 이렇게 여행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라파의 집에는 한 해 600명씩 혈액 투석 환자와 가족들이 찾아온다. 혈액 투석 환자는 환경 부담금 2000원만, 동행한 가족은 1인당 하루 2만5000원씩 식비만 내면 된다. 오가는 여비는 본인 부담이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관계자는 "곳곳에서 보내주시는 후원금으로 시설을 유지하고, 월 5000만원씩 운영비를 감당하고 있다"고 했다. 한화생명·SK 등이 혈액투석기를 기증했다. 건강식품·생활용품 유통업체 애터미가 숙소 식당에 밥과 김치를 댄다. 1층 로비에 있는 TV는 군산중앙고 생명나눔동아리가, 도서실에 있는 TV는 대원외고 해도지 봉사단이 가져왔다.
이동형 연세의대 부교수는 "만성 신장병 환자에게 혈액 투석은 족쇄와도 같다"며 "이들에게 여행은 일반인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의 큰 활력이 된다"고 했다. 혈액 투석 치료 선진국인 대만에서는 2007년부터 투석 환자의 해외여행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도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