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국인의 이름은 언제나 수퍼히어로 곁에 있다. 스파이더맨·아이언맨·엑스맨·배트맨·호크맨…. 모든 '맨'은 이 남자의 서명 이후에 비로소 힘을 얻는다. 최근 미국 거대 만화사 마블코믹스가 80주년을 맞아 제작을 결정한 만화책 시리즈 '마블 좀비스' 표지에도 가장 먼저 이름을 새겼다. "사인회를 열면 독자들이 만화책을 보물처럼 들고 온다. 겉면에 지문 안 묻히려고 장갑까지 끼더라. 내 그림을 문신으로 새겨오는 분들 때문에라도 대충 그릴 수가 없다."
만화가 이인혁(34)씨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한 작가다. 2012년 마블코믹스와 계약해 만화책 얼굴 격인 표지(cover)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하고 있는데, 지난 1월엔 마블의 숙적 DC코믹스와도 계약을 맺었다. 석정현·임강혁 등 미국 업계에 진출한 한국 작가가 여럿 있지만, 이씨의 작업량은 압도적이다. 이씨는 "지금껏 100개 넘는 시리즈에 참여했는데 표지를 누가 그리느냐에 따라 판매량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견제 때문인지 DC코믹스와 손을 잡자 마블 측에서 독점 작가 제안이 왔을 정도"라고 했다. 이달 국내 공개되는 최신작 '배트맨: 언더 더 레드 후드' 역시 이씨가 표지를 맡았다. "배트맨과 조커, 분노로 포효하는 레드 후드를 번개가 내리치며 삼분할 한다. 그릴 땐 감정 이입을 해야 한다. 할퀴는 울버린이 되거나 처맞는 헐크가 돼야 한다. 거울 보며 표정 연습을 자주 한다."
벤 올리버 등 외국 만화가와 팀을 이뤄 각국 만화 축제를 누비는 그는 2~4일 코엑스에서 열리는 '코믹콘 서울'에도 참가해 라이브 드로잉 쇼를 선보인다. 전 세계를 날아다니지만, 토종 국내파다. 수퍼히어로를 처음 접한 것도 중학생 때였다. "'스파이더맨'을 보고 그림체와 연출 방식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았다"며 "대학 입학 후 아버지가 선물해준 컴퓨터로 연습하며 지금의 그림체를 발전시켰다"고 했다. 결정적 계기는 2012년에 왔다. 정부 지원 사업 공모에 발탁돼 6개월 미국 연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당시만 해도 '마블' 하면 '부루마불'을 먼저 떠올리던 시절이었다"며 "큰물에서 놀고 싶었고 '마블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출판사에 포트폴리오를 보냈고, 마블 부사장 세블스키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만화 '데어데블' 스토리를 주면서 나흘 내로 그림 원고 3페이지를 보내라더라." 이틀 만에 4페이지를 그려 보냈다. 그리고 그해 '어벤져스 어셈블'을 기점으로, 밤샘과 근육통을 동반한 초인적인 여정이 시작된다. 연 수입은 "대기업 임원급 연봉 수준"이라고 했다.
대개 수퍼히어로 캐릭터는 탄탄한 전통 덕에 참고 자료가 많지만, 가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할 때도 있다. 게임 회사에서 다져진 경험이 빛을 발할 순간이다. "2013년 '인피니티' 시리즈 등장인물 '블랙 드워프'가 들 도끼를 그려야 했다. 그런데 기존 디자인이 없었다. 편집부에서 그냥 알아서 해달라더라. 게임 회사 다닐 때 공부했던 무기·갑옷 고증이 큰 도움이 됐다." 매번 악쓰고 피 터지는 장면만 그리는 건 아니다. "마블 에디터가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전투할 때만 변신할 뿐, 수퍼히어로도 일상을 누리는 존재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토르가 숲속에서 작은 새를 바라보거나, 햄버거를 먹고 있는 스파이더맨의 뒷모습을 그려넣곤 한다.
만화 밖에서도 감동은 일상에서 먼저 온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대우가 다르다. 미국에선 독자가 작가에게 사인 한번 받을 때 10달러를 낸다. 표지에 조그만 그림 하나 그려주면 90달러다. 만화책 보호 케이스를 따로 팔고, 만화책을 영구 보존해주는 업체도 있다. 이런 시장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수퍼히어로는 '데드풀'이다. "불사(不死)의 캐릭터가 좋다. 나는 오래 살고 싶다. 더 많이 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