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진 산업2부장

일본이 열흘 전 경제 보복을 발표한 뒤 한국은 뒤집어졌다. 우리가 반도체를 만들 때 거의 100% 일본에 의존하는 소재 3개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 반도체 산업의 일본 의존도가 새삼 부각됐다. 의존도가 높은 이유는 일본산이 압도적으로 좋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여론은 여러 갈래로 나온다. "일본이 본색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가 징용 문제를 잘못 다뤘다" "우리도 보복 카드를 만들자" 등이다.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런데 동의하기 힘든 게 있다. "우리 반도체 산업이 허상(虛像)이었음이 드러났다"는 말이다.

한국은 반도체 소재 개발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연 수백억원씩 투자해 협력사와 핵심 소재 국산화를 위한 공동 연구·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쓰는 불화수소는 99.999%의 순도를 갖고 있다. 순도 99.9%만 돼도 반도체 수율(생산품 대비 완벽한 제품의 비율)이 떨어진다. 이 수준은 일본 업체만 맞출 수 있다.

노력도 해봤다. 업계는 불화수소 국산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2010년대 초반 불화수소 공장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했다. 이후 관련 규제가 강화됐고 불화수소 국산화 시도는 사실상 멈췄다. 3개 소재를 만드는 5개 일본 기업의 설립 연도는 1913~1936년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전신인 한국반도체가 만들어진 게 1974년이다. 업력을 뛰어넘지 못한 것이다. 2010년 현 산업통상자원부의 전신인 지식경제부는 2015년까지 반도체 장비 국산화율 35%를 달성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2017년 기준 국산화율은 18%에 불과하다.

이 정도 되면 이런 소재·장비로 어떻게 세계시장에서 삼성전자가 1위, SK하이닉스가 3위를 하는지부터 의아해하는 게 정상이다.

반도체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소재·장비·제조다. 한국은 이 중 제조 기술에 온 화력을 집중했다. 소재와 장비는 국제 분업 시스템에 따라 수입하는 대신 같은 재료와 소재를 써도 더 효율적인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기술에 집중한 것이다. '나노 공정'이라는 초미세 공정이다. 또 반도체 중에서도 변화 주기가 빠른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했다. 삼성그룹은 공급을 크게 늘려 시장 가격을 떨어뜨린 뒤 경쟁자와 같이 적자를 감수하는 '치킨게임'을 감행했다. '누가 안 죽나'를 겨루는 경쟁에서 엘피다·난야·키몬다 등 일본·대만·독일 회사들이 탈락했다. 허상이 이런 일을 할 수는 없다.

배경에는 무지막지한 투자가 있었다. 실행자는 국가가 아니라 대기업이었다. 국가가 주도한 철강·중공업과는 출발이 다르다. 삼성그룹은 1983년 반도체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선 뒤부터 1988년까지 8억달러를 쏟아부었다. 초반 수년 동안 매년 수천억원씩 적자를 봤다. 그룹 자체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현대그룹은 더 늦게 뛰어들었다가 외환 위기 땐 그룹이 충격을 받고 결국 손을 뗐다. 그 밖에도 반도체에 손을 댔다가 망했거나 망할 뻔한 대기업은 한두 곳이 아니다.

이후에도 한국 반도체는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하이닉스는 주인도 없이 채권단 손에 이리저리 휘둘린 세월이 11년 7개월이다. 중간에 미국이나 중국에 팔릴 뻔한 순간도 있었다. 삼성도 공급 과잉과 부족 사이를 줄타기하는 반도체 순환 주기에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위기 극복에 우리 정부가 뭘 도와줬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본의 경제 보복은 시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 자체가 국가와 국가 간 외교에서 발생했다. 갈등이 폭발한 지점도 국가 간 무역이다. 해결 책임은 정부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