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4월 총선 개표 방송에선 핑크(분홍색)를 볼 수 있을까.
자유한국당이 정당 상징색으로 '밀레니얼 핑크'를 실험 중이다. 빨간색을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다. 황교안 대표가 최근 취임 100일을 맞아 펴낸 책의 표지와 토크 콘서트 홍보 포스터, 여의도연구원 명함에 일제히 밀레니얼 핑크가 등장했다. 밝은 파스텔톤의 분홍색. 밀레니얼 세대가 선호하는 색상이라고 한다.
한국당 강지연 콘텐츠 태스크포스(TF) 팀장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당 안팎의 바람 속에 해본 시도"라며 "20~30대와 여성 유권자의 반응이 좋지만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상징색 교체 검토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부터 벗어나기'인지 묻자 "그것은 좌파 매체들이 보수를 분열시키려고 들씌운 해석"이라며 부인했다.
한국당은 2012년 한나라당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파랑에서 빨강으로 색깔을 갈아탄 전례가 있다. 국내 정당 사상 최초의 '컬러 마케팅'이었다. 금기(禁忌)로 통하던 빨간색을 선택해 쇄신 메시지를 던졌고 그해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했다.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은 또 그렇게 시장에 나온 파랑을 붙잡고 2016년 총선에서 제1정당으로 올라섰다. 정당색 바꾸기가 잇따라 효능을 증명한 셈이다.
컬러 리사이클링(color recycling)?
한국 정당들은 분당과 합당, 이합집산이 잦다. 상점이 간판을 갈듯이 당명과 상징색을 자주 바꾼다. 하지만 유권자를 끄는 선명한 색깔은 5원색(빨강·노랑·파랑·초록·보라) 정도로 한정돼 있다. 지향점이 다른 정당이 버린 색이라도 눈을 질끈 감고 주워 쓴다. 이른바 '컬러 리사이클링', 색깔 재활용이다.
파란색을 두고는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안철수 후보는 2012년 말 대선 출마 때 파란색을 상징색으로 썼다. 2013년 신당 창당을 준비하던 그는 그해 9월 민주당이 노란색에서 파란색으로 간판을 바꾸자 땅을 쳤다. 한때 "안철수 신당이 울며 겨자 먹기로 핑크를 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결국엔 하늘색을 썼다.
현재 정의당은 복지를 강조하는 따뜻한 정당을 표방하며 노란색을 쓰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의 상징색이었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당내에서 불만이 나왔지만)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색깔이 노란색과 주황색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2017년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으로 쪼개지며 사라진 국민의당은 과거 새천년민주당이나 통합민주당이 사용하던 초록색의 채도를 바꿔 재활용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상징색은 돌고 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는 기업 경영 못지않게 역동적(?)이다.
한국당의 밀레니얼 핑크 실험에는 강경 보수와 '꼰대 정당' 이미지에서 벗어나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고민이 담겨 있다. 김세연 여의도연구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기존의 보수층, 즉 '집토끼'만으로는 30%대 지지율을 유지하기도 힘들다"며 "20~30대와 중도층, 무당층의 지지를 끌어내는 과감한 아이디어와 이벤트를 발굴할 것"이라고 했다. 민주당은 "(한국당이) 부드러운 색깔을 사용한다고 해서 국민이 진정성을 느낄 수는 없다"며 "과거의 잘못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고 논평했다.
집토끼냐 산토끼냐
한국 사회에서 빨강은 한동안 색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단어였다. 2002년 월드컵과 '붉은 악마'의 축제는 이 색깔에 드라마틱한 면죄부를 주었다. 건축가 서현은 '빨간 도시'에서 "빨강이 이데올로기에서 자신감의 표현으로, 나아가 보수 정당의 상징색이 되는 과정은 그 논리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작스럽게 전개됐다"고 설명한다.
그전까지는 파란색이 30년 넘게 보수의 색깔이었다. 강지연 팀장은 "2012년 새누리당의 컬러 마케팅이 성공한 것은 포장뿐만 아니라 내용물도 함께 바뀌었기 때문"이라며 "박근혜 당시 비대위원장이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충을 전면에 내세웠고 이준석, 손수조 등 청년을 중용했다"고 말했다. 그런 변화를 보수 정당이 금기로 여기던 빨간색으로 잘 포장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1987년 평화민주당을 시작으로 녹색과 노란색을 상징색으로 써왔다. 하지만 2013년 민주당은 "이종교배(異種交配)를 시도하며 새누리당을 흉내 낸다"는 비판에도 중도층을 끌어안겠다며 역사상 처음으로 파란 간판을 달았다. '안정' '신뢰' '미래'로 인식되는 이 파란색은 외연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는 평이다.
핑크는 '따뜻함' '보살핌' '존중' '여성'을 뜻하는 색깔이다. 허은아 한국이미지전략연구소 소장은 "국내 정당들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 수단으로 상징색을 고르는 추세"라면서도 "핑크는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도 상품에 쓰기 주저하는 색깔"이라고 말했다. 허 소장은 "청년과 여성에 호소하려는 뜻은 알겠지만 한국당이 핑크만 쓴다면 큰 모험일 것"이라며 "'산토끼(새로운 지지층)' 잡으려다 '집토끼'를 놓칠 수도 있다"고 했다.
'핑크 상륙작전' 전망은
경남도청 현판은 2018년 6월 지방선거 전까지 빨간 바탕에 흰 글자로 '당당한 경남시대'였다. 지방선거가 끝나자 흰 바탕에 파란 글자로 '완전히 새로운 경남'으로 바뀌었다. 한국당에서 민주당으로 지방권력이 교체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당이 지향하는 가치와 그 색깔이 얼마나 부합하는지 따져봐야 한다"며 "중요한 것은 정당색이나 구호가 아니라 내용물"이라고 말한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정치학)는 "극장 외벽(정당색)만 바꾸고 안에 돌아가는 필름(콘텐츠)은 그대로라면 일시적인 '쇼'에 불과하다"며 "색깔만 가지고는 애착심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당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가치와 일체감을 가지고 국민 속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느냐가 열쇠"라고 했다.
한국당은 과연 '핑크 상륙작전'을 감행할 수 있을까. 지난 24일 임명장을 받은 김찬형 자유한국당 홍보본부장은 "개인적으로 와인색과 핑크를 좋아하지만 정당색을 바꾸는 작업은 정교한 설문조사와 함께 국민과 소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며 "나는 황교안 대표나 한국당 의원들이 아니라 고객인 유권자의 의견을 섬길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는 정당명과 상징색 등을 다 열어놓고 궁리를 시작하는 단계다. 2002 월드컵 개막식을 연출하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프레젠테이션을 기획한 김 본부장은 "빨간 사과 껍질을 버리고 과육만 먹는다고 해서 사과를 안 먹는 게 아니듯이 뿌리까지 바꿀 수는 없다"며 "한국당이 가진 이미지의 단점은 솎아내고 장점은 확장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