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 용 한 마리가 입에서 불을 뿜으며, 그림 틀을 깨고 날아올라 책 밖으로 튀어나갈 참이다. 거세게 꼬리를 휘젓는 바람에 본문의 문단이 반으로 갈라지며 문장이 흐트러졌다. 용이 상대를 공격할 때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불이나 독을 쏘거나 입으로 무는 게 아니라, 꼬리를 쓴다. 꼬리 힘이 어찌나 센지, 거대한 코끼리도 용이 꼬리로 다리를 휘감아 들어 올리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이게 바로 그림 속, 반으로 갈라진 문장에 라틴어로 쓰여 있는 내용이다. 책을 읽는 이들은 이처럼 그림과 문자의 기발한 조화 덕분에 용의 권능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베스티아리(Bestiary)'란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일종의 문학 장르다. 책 한 권에 온갖 동식물과 함께 상상의 괴수들을 그려 넣고 설명과 함께 교훈적 이야기를 담았다. 이처럼 동물을 소재로 한 이야기는 고대부터 존재했으나, 중세 이후로는 사악한 괴수와 정의롭고 순수한 동물을 대비해 세상의 악을 물리치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종교적 의미를 갖게 됐다. 기독교에서 사악한 괴수의 대표가 바로 뱀들의 왕, 용이다. 용이 다리를 감는다는 말은 곧 죄를 지은 인간들이 자기 죄에 다리를 묶인 채 천국에 닿지 못하고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뜻이다.
18세기 영국의 소장가 이름을 따서 ‘할리 필사본 3244번’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13세기 중반, 성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설교용으로 주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종교적 목적이 뚜렷하지만, 한편으로는 다양한 괴수들의 기이한 생김새와 박진감 넘치는 모험담 자체가 사람들을 매료했을 것이다. 오늘날, 공포와 감동을 동시에 주는 괴수 영화의 원조가 바로 ‘베스티아리’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