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무엇이냐?" 염라대왕이 물었다. "화가입니다." 그가 답했다. "세상에 색(色) 안 쓰는 화가도 있더냐? 넌 화가가 아니다!"

호통을 듣고 단색화가 하종현(84)은 퍼뜩 꿈에서 깨어났다. "10년 전이었나. 건강이 안 좋던 때였는데 아차 싶었다. 본질은 잊고 딴 데서 놀고 있었구나. 앞으론 무한정으로 쓰자. 색이란 색은 다 쓰자." 몇 달 전부터 그의 전매특허 '접합' 시리즈에 다홍색이 등장했다. 45년 만에 처음이다. "그간 캔버스 마대(麻袋)와 물감이 겉돌까 무채색 위주로 그려왔는데, 앞으론 어떤 색이 더 나올지 나도 모르겠다."

하종현이 일산 작업실의 ‘접합’ 시리즈를 배경으로, 조그맣게 인쇄된 ‘접합’ 그림을 들고 있다.

박서보·정상화와 함께 한국 단색화를 대표하는 그의 개인전이 부산 수영구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7월 28일까지 열린다. 신작을 포함한 그의 전매특허 '접합' 시리즈 15점을 선보이는 자리다. '접합'은 전쟁통 군량미를 담던 마대를 캔버스 삼아, 뒷면에 물감을 짠 뒤 밀대로 짓이겨 앞면으로 밀어내는 배압법(背押法)의 결과. "뒷면에 물감을 짜 그리는 놈이 누가 있겠나 싶어 시작했다. 상식대로만 하면 서양 미술과 차별이 안 된다. 물감이 마대 올 사이로 밀려 나올 때, 물감은 스스로 얼굴을 만든다. 화면에 자연과 우연의 숭배가 담기게 된다." 그림 표면에 횃불 연기를 쏘인 뒤 그을린 물감을 다시 펴 발라, 화상(火傷) 이후의 새살을 드러내는 화풍도 이 같은 자연성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그의 철학에 외국이 반색한다. 지난 3월 도쿄 블럼앤드포갤러리에 이어 9월 밀라노 카디갤러리, 내년 2월 런던 알민레시갤러리 개인전이 열리고, 다음 달 베이징 송미술관 단체전 '추상'에도 참여한다.

인기가 높아지면서 그림 도난 사건도 겪었다. 2016년 1월, 그의 일산 작업실에 괴한이 침입해 벽에 걸려 있던 그림 두 점을 칼로 잘라 사라진 것이다. CCTV 없는 외진 동네인 탓에 그림의 행방이 묘연했다. "그러다 반년 뒤 그림을 되찾았다"고 했다. 알고 보니 범인이 또 다른 단색화 거장 정상화(87)의 여주 작업실에서도 작품을 훔쳐 달아났다가 그해 5월 말 경찰에 검거됐고, 여죄 추궁 끝에 하종현의 단색화까지 손댄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림이 완성되려면 다 그리고도 3~6개월이 걸린다. 물감이 마르는 데 오랜 밤낮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간이 완성하는 그림"이다. 시간은 흘러 그가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창립한 지 올해 50년이 됐다. 캔버스 위에 실제 철조망과 밧줄 등을 붙여 시대에 저항하거나, 색채와 물성을 새로이 드러내려는 시도가 그 안에 있다. "황반변성 탓에 시력에 문제가 생겼다. 비유하자면 귀를 잃어가는 베토벤이랄까. 그래도 매일 새롭게 밀어낸다. 나는 죽을 때까지 아방가르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