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위 패션의류업체 자라(ZARA) 매장에선 1주일에 2차례씩 신제품을 선보인다. 1주일 만에 다시 찾아가면 전에 봤던 옷은 거의 없고 대부분 새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 1주 정도 판매 추이를 지켜보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매장에서 바로 빼기 때문이다. 잘 팔리더라도 최대 4주까지만 상품을 놔둔다. 할인 이벤트는 1년에 두 차례로 제한한다. 그래서 자라 고객은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망설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지갑을 여는 경향이 있다. 자라가 세계 패션의류업계를 정복한 비결은 바로 이런 속도전에서 앞서갔기 때문이다.
IT 기업 같은 본사 건물
스페인 북서부 항구도시 라코루냐. 대서양과 맞닿은 이곳에서 차로 20분 정도 달리면 나오는 대지에 세계 1위 패션의류업체 자라 본사가 둥지를 틀고 있다. 본사 면적이 7만9896㎡(2만4000여평). 축구장 10개에 달하는 규모다. 단순한 디자인에 푸른 유리벽이 건물을 감싸고 있어 실리콘밸리 IT(정보기술) 기업 건물을 연상케 한다. 내부로 들어서니 아무 장식이나 알림판 없는 하얀 벽이 이어졌고 사무실은 흔한 꽃 장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애플 매장을 방문한 느낌이었다. 그 복도로 형광색 바지에 울긋불긋한 티셔츠를 걸친 직원들이 바쁘게 오갔다. 전 세계에서 모인 직원 5000여명이 '정확(accuracy)', '중앙집중(centralization)',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3가지 철칙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자라 모기업 인디텍스(Inditex)는 자라를 비롯해 자라홈, 오이쇼, 마시모두띠, 풀앤베어, 버쉬카, 스트라디바리우스, 우테르퀘까지 8개 브랜드를 보유하고 있다. 전 세계 매장 수는 96개국 7490개에 달한다. 맏형 격인 자라는 1975년 라코루냐에 첫 매장을 연 이후 44년간 96개국에 2259개 지점을 세우면서 파죽지세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인디텍스의 지난해 매출은 261억4500만유로(약 34조7684억원). 수년 전까지 의류업계에서 H&M과 1~2위를 다퉜지만 지금은 매출이 35%가량 차이가 난다. 자라 독주(獨走)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명·온도·습도까지 본사서 조절
자라는 라코루냐 본사가 두뇌이자 심장이다. 이곳에서 제품 기획부터 디자인, 구매, 유통, 온라인 쇼핑몰 관리, 심지어 전 세계 매장 조명과 온도·습도 조절까지 이뤄진다. 통상 의류업체들은 봄에 가을·겨울 옷, 가을에 이듬해 봄·여름 옷 상품군을 선보이면서 패션쇼를 진행한다. 반면 자라가 계절상품을 미리 제작하는 비율은 15~25% 정도다.
계절이 시작될 무렵에 만드는 것까지 합쳐봤자 50% 수준. 전체 중 절반은 그 계절을 지나면서 유행과 취향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보고 신속하게 디자인을 변경, JIT(Just In Time·적기 공급 생산) 방식처럼 의류를 쏟아낸다.
이런 초고속 생산 체계 덕분에 자라 제품은 할인 염가 판매와 거리를 두고 있고, 전체적으로 평균 판매가가 정가의 85% 선을 유지한다. 60~70%인 기존 의류업계 평균보다 단연 높다.
재고도 적다. 다른 브랜드는 생산 제품 중 17~20%가 재고로 남는 것과 비교해 자라 재고율은 10% 선이다. 헤수스 에체바리아 인디텍스 CCO(최고 커뮤니케이션 책임자)는 "옷을 단지 빠르게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라면서 "더 중요한 건 고객이 원하는 옷을 정확히 만들어 빨리 배송·판매하는 기술"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라는 '패스트(fast)' 패션이 아니라 '정확한(accurate)' 패션이라는 게 이들 자부심이다. 자라는 이런 식으로 패션 산업을 제패하고 의류업의 본질을 바꾸고 있다. 고객들은 자라 제품을 소비하는 즐거움을 '자라가슴(Zaragasm)'이라는 신조어로 표현한다.
자라 추격하는 세계 의류업체들
스페인 자라가 제왕으로 군림하는 SPA(패스트 패션) 시장은 스웨덴 H&M과 일본 유니클로가 세계 3강 체제를 이루면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자라 아성에 도전하는 업체는 H&M과 유니클로만이 아니다.
아일랜드 프라이마크와 중국 미터스본위 같은 신흥 세력들이 무섭게 추격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삼성물산 에잇세컨즈를 필두로 이랜드의 스파오(SPAO), 신성통상의 탑텐 같은 브랜드가 호시탐탐 글로벌 진출을 노리고 있다.
WEEKLY BIZ는 지난달 스페인 라코루냐 자라 본사를 사흘간 돌아보면서 자라가 어떻게 세계 의류 시장을 정복했는지 살펴보고, 세계 SPA업계의 현재와 미래를 분석했다.
자라의 성공비결
세계 1위 '자라' 누가 어떻게 만들었나
세계 1위 패션의류업체 자라(ZARA)는 거칠게 요약하면 한국 동대문 시장 제조생산 방식과 닮았다. 최신 유행 패션을 신속하게 파악한 다음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생산하고 판매한다는 점에서다. 다만 동대문시장 제품이 아직 중국과 한국 경계에서 머물고 있는 반면 자라는 글로벌 최고 의류상으로 도약했다. 왜 이런 차이가 났을까. 자라 본사 시설들을 돌아보며 느끼고 분석한 자라만의 강점을 다섯 가지 정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획·디자인·견본제작·배송팀이 한 공간에
자라 성공 첫 번째 비결은 속도를 극대화한 시스템에 있다. 자라 본사는 층별로 여성복, 남성복, 아동복으로 나뉘어 있다. 사무실에는 별도 벽이나 칸막이가 없이 상품기획팀, 디자인팀, 견본제작팀, 배송팀 등 모든 부서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제품 매니저'가 매장과 연락을 주고받아 고객 취향을 실시간으로 분석하면 바로 옆자리에서 신상품 디자인이 시작된다. 완성된 디자인은 같은 공간에서 재봉질을 거쳐 시제품으로 만들어진다. 이를 모델이 착용해본 다음, 최종 생산 여부를 결정한다.
생산이 결정되면 본사 바로 옆 공장에서 작업이 시작된다. 공장에서는 가장 먼저 원단에서 옷감 패턴을 뜨는 작업을 벌인다. 컴퓨터에서 테트리스 퍼즐을 떠올리게 하는 프로그램이 수차례 돌아가며 자투리 천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옷감 절취선을 찾아낸다. 이후 기계가 정해진 선을 따라 원단을 잘라낸다. 한 번에 최대 200장을 자를 수 있는 기계다. 이 조각들이 외부 생산공장으로 보내져 완제품으로 탄생한다. 이후 이 제품은 다시 자라 본사로 돌아와 검수를 거친 뒤 다림질로 마무리된다. 직원들은 사람 신체 모양을 뜬 판 위에 옷을 올려 다림질한 다음 소매에는 뜨거운 바람을 주입해 둥근 형태를 유지하도록 모양을 잡는다. 이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본사서 전세계 매장 진열·조명·온도·습도 조절
본사 지하에 내려가니 난데없이 대형 쇼핑몰이 펼쳐졌다. 인디텍스 8개 브랜드별로 매장이 실제와 똑같이 꾸며져 있었다. 마네킹부터 조명, 인테리어, 상품 배치까지 실제 매장과 동일했다.
이곳은 ‘랩(실험실)’으로 부르는 실험용 매장이다. 전 세계 7490개 매장은 이곳에서 정해진 진열 방식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 바로 옆 관제실에 도착하니 10여명 직원이 모니터 앞에 앉아 전 세계 매장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매장 조명, 온도, 습도 등 모든 조건을 여기서 통제하고 시차를 고려해 관제실을 24시간 운영한다.
자라 제품은 57%를 스페인을 비롯한 포르투갈, 터키, 모로코 등 인접국에서 생산하고, 나머지 43%는 중국, 방글라데시, 베트남, 브라질 등 원거리 국가에서 받는다. 그런데 중국에서 생산하고 중국 매장 판매용일지라도 일단 스페인 본사에서 검수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라 모든 제품은 스페인 내 10개 물류센터 중 하나를 거쳐 전 세계 매장으로 비행기로 운송된다.
자라 물류센터는 전 세계 매장별로 제품을 직접 보낸다. 보통 해외 브랜드라면 서울 인근에 대형 창고를 두고 제품을 보관하는데, 자라는 이런 과정을 생략한다. 자라 명동 매장 매니저가 본사에 필요한 제품을 요청하면, 스페인 물류센터에서 해당 매장으로 곧바로 제품이 날아온다. 한국에 도착한 물건이 창고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다. 펠리페 카로 UCLA 경영대학원 교수는 “자라 성공 비결을 한 가지만 고르자면 ‘중앙집중화(centralization)’”라고 지적했다. 헤수스 에체바리아 자라 CCO(최고홍보책임자)도 이런 분석에 동의하면서 “자라는 본사에서 전 세계 매장을 직접 통제하고 있으며 이게 경쟁력의 원천”이라고 말했다.
스타 디자이너·스타 비즈니스맨 없이 데이터로
자라 본사 3층에서는 디자이너 15명이 회갈색 재킷을 입은 모델을 둘러싸고 서 있다. “클래식하면서 트렌디해서 좋네요.” 중국인 디자이너가 말문을 열자 영국인 디자이너는 “형태가 다소 과감해 보수적인 시장에서는 어떨지 의문이 들어요”라고 맞받아친다. 뒤편에 서 있던 다른 디자이너는 빅데이터 분석 자료를 꺼내며 “소비자 구매 패턴을 분석해 보니 중국 시장에는 과감한 색상, 유럽에는 단색으로 제작하는 게 좋겠네요”라고 말했다. 다른 디자이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라는 신제품 실패율이 1% 미만이란 성적을 자랑한다. 의류업계 평균이 17~20% 안팎이란 사실을 놓고 보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 저변에는 철저한 데이터 기반 수요 예측 모델이 자리 잡고 있다. 자라는 상품 수요 예측과 재고 관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05년 MIT 경영대학원 제러미 갤리언 교수(현 런던비즈니스스쿨 교수)와 전 세계 매장 판매·재고 데이터를 분석해 재고 최적 분배 시스템을 개발했다. 블룸버그는 “자라는 ‘더 많은 데이터, 더 적은 상사(more data, fewer bosses)’로 혁신을 이뤘다”면서 “신제품 디자인은 상사의 지시가 아닌 디자이너 간 토론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뤄진다”고 분석했다. 인디텍스 파블로 이슬라(Isla) 회장은 “자라에는 스타 디자이너도 없고 스타 비즈니스맨도 없다”며 “상사 지시 대신 각자가 데이터를 참고하여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일한다”고 말했다.
에체바리아 자라 CCO는 “옷을 빠르게 만드는 것보다 소비자가 원하는 걸 정확히 읽어내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디자이너의 감에 의존하기보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품 기획을 결정한다는 얘기다. 본사에서 일하는 300여명 디자이너는 ‘제품 매니저’가 분석한 매장 내 소비자 취향과 의견을 토대로 새로운 상품을 신속하게 디자인하고 있다. 결국 매장에서 벌어지는 소비자 행동 패턴을 읽어내는 제품 매니저 역할이 중요하다.
본사에 30개 국적을 가진 직원이 근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국민이 아니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면서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어내기 위해서다.
年 4억5000만개 상품 생산… RFID로 재고 관리
자라 매장에서 원하는 상품을 골랐는데 맞는 치수가 없을 때 직원에게 문의하면, 스마트폰을 꺼내 가격표 QR 코드에 댄다. 그러면 해당 치수가 매장 창고에 있는지, 인근 다른 매장에 있는지 등 갖가지 정보가 화면에 뜬다.
자라는 1년에 약 4억5000만개 상품을 생산한다. 매장에는 늘 수백 가지 상품이 진열되어 있는 데다, 이마저 매주 신상품으로 교체된다. 이 때문에 아무리 훌륭한 직원이라고 해도 상품과 재고를 기억해서 파악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를 위해 자라는 무선주파수인식(RFID)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왔다. 옷이나 액세서리 등 모든 아이템에 붙어 있는 RFID 칩은 해당 제품 색상, 치수, 매장 내 위치, 판매량 등 모든 정보를 저장한다. 원피스가 한 장 팔리면 재고 관리실에서 실시간으로 파악해 똑같은 치수 옷을 바로 채워 넣을 수 있다.
서울 강남점처럼 3300㎡ 넘는 매장에 가득 쌓여 있는 재고 물량 파악도 1명이 반나절이면 거뜬히 해낸다. RFID 리더기를 손에 들고 매장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만 해도 모든 상품 정보가 한꺼번에 읽혀 중앙 컴퓨터로 보내지고, 이를 모니터에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라 특유 RFID 기술은 아직도 진화 중이다. 매장에서 필요한 재고가 본사 물류센터에 있다는 사실만 확인하는 차원을 넘어 물류센터 내 몇 번째 옷걸이에 걸려 있는지도 파악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환경단체 승인 받은 원단·폴리에스테르 사용
자라 본사에서 차로 45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인디텍스 브랜드 풀앤베어(Pull&Bear) 본사에 들어서니 사무실 벽면의 통창 유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펼쳐진 숲을 보고 “전망이 훌륭하네요”라고 감탄하자 “에너지 절감을 최우선으로 지어진 친환경 건물”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낮에는 실내조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한 햇살이 사무실 안쪽까지 비친다.
인디텍스가 주도한 패스트패션 산업은 빠른 상품 회전율과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을 지배했지만, 의류도 일회용품처럼 잠깐 입고 버릴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결국 막대한 의류 폐기물을 초래했고, 환경단체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이런 시대적 반발에 발맞춰 인디텍스는 ‘지속 가능한 성장’을 경영 전략 한 축으로 채택했다. 유행에 민감한 자라의 저력을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 셈이다. 이런 고민으로 탄생한 생산라인은 ‘조인 라이프’. 일부 상품에 조인 라이프 라벨을 따로 붙인다. 이 조인라이프 제품은 환경단체 승인을 받은 면이나 텐셀 원단, 유기농 면, 재활용 면, 재활용 폴리에스테르 등을 활용한다. 생산 과정에서도 인디텍스 고유의 ‘그린투웨어’ 기술을 사용한다. 공업용수를 재활용하고 화학 처리 과정도 친환경적으로 운용한다. 인디텍스 담당자는 “친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섬유 소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앞으로 과거 사용했던 소재와 신소재를 결합하면서 생산방식을 개혁해가겠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