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휴일인 지난 1일 오후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 속 라스 에라스(Las Heras) 공원. 면적 1000㎡의 이 공원 잔디밭은 소풍 나온 수백 명의 사람으로 만석이었다. 가족, 연인, 친구 등 만나는 사람은 제각기 달랐지만 한 가지 모습만은 모두 같았다. 항아리 모양의 독특한 잔(盞)을 빨대 하나로 나눠 마시는 모습이다. 구암파(Guampa)라 불리는 전용 잔에 담긴 마테차(茶)였다.
아르헨티나는 '남미의 유럽'이라 불린다. 유럽계 백인이 전체 인구(약 4500만명)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건축 양식부터 음식 문화까지 유럽을 닮았다. 특히 이탈리아계 인구가 55% 이상이라 거친 운전 습관까지 닮았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문화만큼은 다르다. 커피를 즐기지 않는다. 국제커피기구(ICO) 통계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아르헨티나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1㎏으로 유럽 평균 소비량(5㎏)에 한참 못 미친다. 한국(1.8㎏)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커피를 밀어낸 자리에는 마테차가 있다. 현지 마테국립연구소(INYM)에 따르면 작년 아르헨티나의 마테차 국내 소비량은 2억6199만㎏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1인당 소비량으로 계산하면 약 6㎏으로 커피 소비량의 6배 수준이다. 마테차의 기원은 남미 원주민 과라니족(族)이다. 잘게 부순 마테나무 잎을 물에 넣어 마시던 전통이 스페인 정복자에게 이어진 것이다.
아르헨티나인들의 마테차 사랑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휴대용 가방에 구암파와 봄비샤(Bombilla·여과 기능이 있는 전용 철제 빨대), 보온병을 들고 다니며 마신다. 마테차를 마시는 방법도 독특하다. 사람 수와 관계없이 잔 하나를 나눠 마신다. 빨대도 같이 쓴다. 여기에는 빈부(貧富)와 성별, 나이와 관계없이 함께한다는 유대(紐帶)가 담겨 있다. 한 잔만 있어도 다 같이 즐길 수 있다 보니 굳이 카페를 찾지 않는다.
경제 불황과 함께 아르헨티나인들의 마테차 사랑은 더 깊어졌다. IMF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지난 1년간 물가 상승률은 55%에 육박한다. 도심 산텔모 시장에서 마테용품을 파는 마르셀로 에스테반 파로(67·사진 오른쪽)씨는 "커피 마시던 사람들도 요즘은 마테를 마신다"고 말했다. 주머니가 가벼워지면서 비싼 수입 커피 대신 값싼 국산 마테차를 찾는 것이다. 마트에서 파는 500g짜리 마테가루 제품 가격은 약 50~100페소(약 1300~2600원)에 불과하다. 한 잔에 20g 정도 가루를 넣고 물을 타서 마신다. 같은 무게 커피가루 제품 가격은 약 150~200페소로 2배 이상이었다. 현지 컨설팅 업체 IES에 따르면, 작년 커피 섭취량은 구매력 감소로 인해 전년 대비 9% 감소했다.
시내 마트에서 만난 주부 마리아 마누엘(38)씨는 "정치나 경제는 늘 힘들지만 마테는 항상 우릴 위로해준다"면서 "정부가 한 가장 잘한 일은 마테 가격을 동결시킨 것"이라고 했다. 지난달 17일 아르헨티나 정부는 향후 6개월간 생활필수품 64종에 대한 가격을 동결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마테가루 제품도 포함됐다. 경제 위기에 지친 아르헨티나인들을 달래고 있던 것은 한 잔의 마테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