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됐다는 돈스코이호 선체. 함명 ‘DONSKOII(돈스코이)’가 보인다. 아래 사진은 침몰 전 돈스코이호의 모습.

150조원. 전설의 보물선 ‘돈스코이호(號)’의 가치라며 신일그룹(現신일해양기술) 관계자들이 홍보한 금액이다. 이들은 배 인양을 미끼로 가상화폐를 발행해 89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1심에서 줄줄이 실형을 선고 받았다. 보물선은 허상(虛像)이었다. 이들은 어떻게 수천명의 피해자들에게 수십억원을 가로챌 수 있었던 것일까.

5일 법원에 따르면 서울남부지법 형사8단독 최연미 부장판사는 최근 러시아 군함 돈스코이호에 금괴가 실렸다고 속여 투자금을 모은 혐의(사기)로 기소된 신일그룹 전 부회장 김모(52)씨에게 징역 5년을, 신일그룹국제거래소 전 대표 허모(58)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전 신일그룹 대표 류모(49)씨는 징역 2년을, 돈스코이호 인양을 총괄한 진모(68)씨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골드코인 떼돈 벌자"...2600명에게 90억원 끌어모아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침몰했다고 알려진 돈스코이호는 2003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과 동아건설의 탐사로 울릉도 인근 해역에서 발견됐다. 금괴나 금화 등 보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돈스코이호는 외교·자금 조달 등의 문제로 인양되지 못하고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신일그룹 관계자들은 돈스코이호가 ‘전설의 보물선’이라는 풍문(風聞)을 이용했다. 돈스코이호에 금괴 200톤(t)이 실려있고, 그 가치가 150조원에 달한다는 것이다. 지난 2017년 이후 한국을 덮친 암호화폐 열풍도 활용했다. 돈스코이호를 인양할 계획이 있는 신일그룹의 가상화폐 신일골드코인(SGC)을 구매하면 수익금을 받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회사 관계자들은 "신일그룹은 매출 3조8000억원과 영업이익 3200억원을 창출한다" "중국 국영기업도 인양에 참여한다"는 내용을 인터넷 홈페이지 등을 통해 홍보했다. 이들은 또 "신일골드코인이 거래소에 상장되면 1개당 1만원 이상으로 거래될 것"이라고 했다. 신일그룹은 2600여명에게 5000여회에 걸쳐 개당 120~200원에 신일골드코인을 팔았다. 이렇게 끌어모은 돈은 89억여원에 달했다.

각자 역할도 있었다. 김씨는 지난해 6월쯤 사기 전과가 있는 주범 류모(44)씨 지시로 서울 영등포구에 신일그룹을 설립, 부회장으로 활동하며 신일그룹의 역사와 자금력을 홍보했다. 허씨는 신일그룹 국제거래소와 함께 별도로 싱가포르 현지 법인을 설립해 신일골드코인이 싱가포르에 기반을 두고 거래가 가능한 암호화폐인 것처럼 꾸몄다.

신일그룹 대표이사였던 류씨 친누나는 암호화폐 신일골드코인 판매 자금을 집행했다. 이 과정에서 코스닥 상장사인 제일제강의 지분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제일제강은 ‘보물선 테마주’로 각광받았다. 다만 제일제강 인수는 성사되지 못했다. 이들이 계약금만 내고 잔금을 치르지 못해서다.

이 과정에서 제일제강의 주가도 요동쳤다. 지난해 7월 2일 1840원이던 제일제강 주가는 신일그룹의 제일제강 인수 소문이 주식 시장에 퍼지자 같은 달 17일 4160원으로 상승했다. 이 과정에서 신일그룹이 ‘페이퍼컴퍼니’라는 의혹이 제기됐고 금융감독원은 불공정거래 행위가 있었는지 조사에 착수했다. 제일제강 주가는 지난해 7월 31일 다시 1460원으로 떨어졌다. 금융위원회 증권선물위원회는 지난달 29일 보물선 테마주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밝혔다.

해군 해난구조대장 출신으로 예비역 대령인 진씨는 돈스코이호 탐사 및 인양 작업을 주도했다. 신일그룹은 주범 류씨가 교도소 동기, 가족, 동거녀 등과 만든 회사로 경찰 조사에서 밝혀졌다. 경찰은 현재 동남아에 있는 주범 류씨를 추적하고 있다.

◇보물 없는 보물선...재판부, "회복 불가"
검찰 조사 결과 돈스코이호에 보물이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었다. 돈스코이호는 발견 당시 보물이 실렸다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다. 보물이 있어도 신일그룹은 인양 자금이 없었다. 중국 국영기업은 돈스코이호 인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적이 없었다. 신일골드코인은 암호화폐 기술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사이버머니 수준이었다. 전자지갑 시스템도 제대로 개발되지 않아 거래도 불가능했다.

한편 돈스코이호를 먼저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다른 업체는 "투자 사기가 의심된다"며 지난해 7월 신일그룹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서울남부지검은 서울 영등포경찰서로 사건을 내려보냈다. 경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신일그룹 관계자들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돈스코이호 150조원 보물이라는 문구는 저희가 일부 언론 보도와 추측성 자료를 검증없이 인용한 것이다. 150조원이라는 금액이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허망한 사과문이었다. 검찰은 지난해 11월 이들을 구속기소했다.

류씨 누나 측은 재판 과정에서 "친동생의 부탁으로 주식회사 신일그룹 대표이사로 등재하고 계좌이체 등 자금 집행 업무를 대신했을 뿐"이라며 "사기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필적 고의가 없었다는 취지였다. 김씨와 허씨도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이들의 항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불특정 다수의 피해자들을 기망해 89억원을 가로챘고, 이를 변제할 가능성이 없는데다 범행 수법을 봤을 때 죄질이 무겁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류씨 누나에 대해 "회사 관계자들이 돈스코이호와 관련해 가상화폐를 홍보하고 투자자를 모집해 투자금을 편취한다는 사정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하고 용인했다"며 "미필적 고의로 인한 사기도 죄가 되므로 공동정범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또 "해외에서 전체 범행을 계획한 동생 류씨의 지시에 따라 관련자에게 자금을 이체해주는 등 범죄를 저질렀다"면서 "다른 공범들과 상호 연결해 사기 범행의 완성에 본질적으로 기여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류씨 누나는 지난해 5월부터 7월까지 170회에 걸쳐 동생으로부터 수천만원 내지 수억원 단위로 총 66억5000여만원을 송금 받았다"면서 "입금 형태나 액수, 송금 대상 등을 고려할 때 정상적인 사업을 위한 투자금이라고 보기에는 이례적이고 비정형적"이라고 했다. 이어 "류씨 누나가 자신 명의의 은행계좌로 입금되는 돈의 출처나 성격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고 단지 동생의 부탁으로 대신 돈을 받았다는 변명은 경험칙상 수긍하기 어렵다"고 했다.

김씨와 허씨에 대해서도 "이들은 법인을 설립·운영해 150조원 보물선 인양 사업과 신일골드코인을 연계시켜 투자자를 모집했다"면서 "사기에 가담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