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젊은이들은 다툽니다. 내가 더 사랑하는지, 네가 더 사랑하는지 저울에 달아보자고. 그 철없는 다툼은 세월 따라 변해가지요. 내 잘못이 더 큰지, 네 잘못이 더 큰지 달아보자. 내 짐이 더 무거운지 네 짐이 더 무거운지….

눈이 부시게 찬란한 이 계절, 저울을 내려놓고 같이 손꼽아봐야겠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몇 번의 봄을 더 함께하게 될지. / 홍여사

우리도 남들처럼 꽃구경이나 가보자고 말을 꺼낸 건 남편이었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동네 뒷산 격인 안산에만 올라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을 거라고요. 아닌 게 아니라, 안산 벚꽃길은 만개한 꽃의 물결로 넘실대고 있습니다. 벚꽃 가득한 비탈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벤치에 앉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봄 햇볕을 쬐었습니다.

"이젠 정말 봄이네."

"그러네."

우리는 잠꼬대같이 흐리멍덩한 말을 한두 마디 주고받다가 다시 나른한 침묵으로 빠져듭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고, 딱히 더 할 말도 없는 우리는 25년 차 부부.

그런데 우리의 졸음에 겨운 침묵을 방해하는 누군가가 있습니다. 젊은 남녀 한 쌍이 우리 앞을 지나다 말고 멈춰 서서, 하필이면 그 자리에서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것도 진지하고 격렬하게…. 보아하니, 다투는 중인 모양입니다. 남자가 손을 내미니 여자가 탁 뿌리칩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남자를 쏘아봅니다.

꽃구경보다 더 재밌는 싸움 구경에, 우리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25년 차 부부인 우리는, 필요한 경우 얼마든지 무언의 대화가 가능하지요. "저 친구들 싸우나 봐." "남자가 무슨 잘못을 했구먼." "남자들은 왜 그럴까?" "쳐다보지 마." "아가씨, 그냥 돌아서 가 버려요. 울지 말고…."

그 순간, 아가씨는 마치 내 말을 들은 것처럼 갑자기 몸을 돌려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하더군요.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고, 우리도 그들의 모습이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눈으로 뒤를 쫓았지요. 안타까웠습니다. 사랑하기에도 아까운 이 계절에 젊은이들이 왜 싸울까? 그때 곁에 앉은 남편이 나지막이 한숨을 토해내며 한마디 하더군요.

"좋~을 때다. 벚꽃 그늘에서 사랑싸움도 하고."

25년 묵은 아내인 나는 그 말의 속뜻을 대번 알아듣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벚꽃 그늘에서 사랑싸움을 했었지요. 진해 군항제였을 겁니다. 당시 해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던 남편을 만나기 위해 저는 새벽 차를 타고 내려갔었죠. 물론 그때는 남편이 아닌 애인. 다른 건 필요 없고,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고 와달라던 그의 부탁에 나는 언니의 크림색 원피스를 훔쳐 입었고, 그 어색한 차림으로 장교복의 남친과 나란히 벚꽃 가지 밑을 걸었습니다. 나지막한 꽃가지 그늘에 갇힌 그의 숨소리가 너무도 크게 들려, 얼굴이 자꾸 뜨거워지던 기억이 지금도 나네요.

그런데 그 좋은 날에 무슨 일로 우리는 다투게 된 걸까요? 어느 순간 그의 손을 뿌리치고 울며 달아난 나는 막 출발하려는 아무 시내버스에나 올라타고 말았지요.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 자리에나 털썩 주저앉는데, 끼익 하고 버스가 급정거하더군요. 남편이 가로막고 세운 겁니다. 가까스로 버스에 오른 그는 내 곁에 와서 섰고, 나는 모른 척 창밖만 보고 있었습니다. 버스는 어딘지도 모를 길을 구불구불 달려갔고, 그 길에도 벚꽃은 활짝 피어 있어 가지가 차창을 스치곤 했죠. 그 장면이 너무도 아름답다 생각했으니, 저는 얼마나 철없는 아가씨였던가요. 승객들 눈엔 어지간히 꼴불견이었을 텐데 그땐 부끄러운 줄도 몰랐습니다. 눈은 아직 눈물에 젖어 있건만, 내 마음은 뿌듯한 행복으로 벅차오르고 있었지요. 이 아름다운 벚꽃 축제의 주인공은 우리였습니다. 헤어지자는 말은 이미 빈말이었고요.

남편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마 기억하겠죠. 그러나 내가 한번씩 그날을 일부러 떠올려보는 줄은 모를 겁니다. 군살 없이 날씬하던 장교복의 맵시. 군모 위에 떨어지던 하얀 벚꽃잎. 버스 좌석을 붙잡은 내 손등에 가만히 겹쳐지던 그의 그을린 손. 들썩이던 그의 가슴….

그런 것들을 떠올리기가 너무 괴로웠던 날들, 그러나 애써 떠올리지 않고는 견뎌낼 수 없는 나날이 우리에겐 있었지요. 20년 세월이면 어느 부부에게나 한 가지씩은 닥쳐오는 불행한 사건이, 우리에겐 두세 가지씩 겹쳤답니다. 아이가 아팠고, 사기당했고, 자의 반 타의 반 별거까지 했습니다. 내 애정이 식었기에 남편을 의심했었고, 남자로서 자신감을 잃은 남편은 저를 마구 억압하려 들었지요. 그런 일들을 겪고도 같이 봄나들이하러 다니는 우리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일까요?

조금 전 울며 싸우던 젊은이들은 우리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사이좋게 늙어가는 중년 부부? 유치한 사랑싸움의 점잖은 관객? 실은 우리도 한창 전쟁 중이랍니다. 사랑싸움이 아닌 인생을 건 싸움이죠. 어리석은 미움과 상처를 극복하고, 오늘의 작은 행복을 만들어가겠다는 결심으로 추억과 미래 사이의 어느 지점을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소리 없는 내 마음의 전쟁. 찬란한 봄은 행복한 젊은이들의 것인 만큼, 힘겹게 나이 먹어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지요. 울며 다투던 젊은 시절보다, 나란히 미소 짓는 지금, 꽃의 기운이 절실합니다. 눈물겹도록….

"내일 비바람 친대. 벚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시 사람들에게 섞여 내리막을 내려가면서, 뒷짐 지고 앞서 걷던 남편이 문득 말합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혼잣말로 대답하지요.

"내년에 또 피겠지. 꽃은…."

그렇죠. 내년엔 내년의 꽃이 필 테고, 우린 아마도 꽃을 보러 다시 이 산을 오르겠죠. 앞으로 몇 번쯤 더, 같이 꽃을 보게 될까요? 열 번? 스무 번? 그중 한 번쯤은 우리도 주책없이 사랑싸움을 하게 될까요? 내가 미안하다고, 아니 내가 더 미안했다고….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