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 감옥 서대문형무소
박경목 지음|일빛|492쪽|2만8000원
서대문형무소는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聖地)'다. 유관순·안창호·한용운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일제 시대 이 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고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그 성지를 지키는 보호자이자 연구하는 학자가 박경목(48) 서대문형무소역사관장이다. 2004년부터 역사관장으로 재직하는 저자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감옥이었던 서대문형무소를 주제로 쓴 역사서가 이 책이다. 독립운동 성지지기의 현장 보고서인 셈이다.
일제 통감부가 서대문형무소를 지은 건 1908년이다. 구한말 항일 의병 투쟁과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감옥은 금세 포화 상태가 됐다. 1910년 전국 감옥 면적(1470평) 대비 수감 인원(7021명)을 계산하면 평당 4.7명에 이르렀다. 1911년 안악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김구(金九)도 '백범 일지'에서 감옥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힘써 밀 때는 사람의 뼈가 상하는 소리인지 벽판이 부러지는 것인지 우두둑 소리에 소름이 돋는다"고 회고했다.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곧바로 감옥 확장 계획부터 세웠다. 1908년 서대문형무소는 면적 1만3000㎡(3934평) 규모에 수용 인원 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이르면 5만5000㎡(1만6500여평)에 수용 인원 2500명으로 4~5배씩 증가했다. 1935년에는 독립운동 탄압을 위해 사상범만 별도 수용하는 특수 감옥인 '구치감'도 운영했다.
당시 형무소의 도면과 사진, 수감자들의 수형(受刑)기록카드 등을 통해 입체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풀어내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수감자들의 일상을 미시사(微視史)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대목이 돋보인다.
당시 형무소는 중앙사(中央舍)를 중심으로 수감자들의 옥사가 방사형으로 뻗어나가는 파놉티콘(panopticon) 구조였다. '모두(pan)'와 '보다(opticon)'를 결합한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간수들이 수감자를 감시하거나 통제하기 용이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식 감옥의 특징으로 꼽았던 그 구조다. 박경목 관장은 "일제는 죽음과 감금의 공포를 자아내는 대규모 시설을 통해서 감옥은 공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일반 대중에게도 각인시켰다"고 말했다.
한겨울에도 일제는 수감자들에게 방한복을 지급하지 않았다. 수인복 사이에 솜을 넣어서 누빌 수 있도록 했지만, 솜은 1벌당 2.35㎏으로 엄격히 제한했다. 수감자들의 식사는 9등급으로 세세하게 구분했다.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는 '사상범'은 5등급 이하의 식사만 제공하도록 했다. 한 끼 270g 이하, 하루 764㎉ 이하였다. 성인 남녀의 일일 권장 칼로리가 2000~2500㎉가량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절대적으로 영양 공급이 부족했던 셈이다. 박 관장은 "독립운동가들을 일상적인 굶주림에 노출시켜 본능적으로 협력할 것을 강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201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온라인으로 공개한 일제 시대 수형기록카드는 6264장. 이 중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4377명 가운데 20대 청년이 절반 이상인 57.5%(2517명)를 차지한다. "20대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식민지 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일제에 저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함경도 출신이 수감자의 31%(1391명)에 이른다는 분석도 흥미롭다. 1920~1930년대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수백 명이 옥고를 치렀고, 함흥형무소에서 이감된 인원이 많다는 이유 등을 꼽았다.
일제 말기 광주 형무소의 통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저자는 형무소 한 곳에서 매년 60여 명이 병사(病死)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뾰족한 끝'이라는 뜻을 지닌 첨단(尖端)이라는 한자어를 통해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의미를 풀이했다. "감옥은 한국민들을 아프게 찌르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식민 지배의 가장 날카로운 끝과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