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부가 살던 집엔 녹아내린 냉장고만 남아 있었다. 키우던 벼 모종과 아로니아 나무는 흔적도 없었다. 4일 저녁 강원 고성군 도로변 전신주에서 시작된 불은 3분 만에 1.6㎞ 떨어진 강원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마을을 덮쳤다. 5일 불길은 잡혔지만 인근 초등학교로 대피했던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와 망연자실했다. 전날 저녁밥을 먹었던 집이 재로 변해 있었다.
이날 낮 원암리에서 만난 송규화(58) 이장은 "마을 주택 105채 가운데 70채가 불에 탔다"고 했다. 주민 김현식(50)씨는 "어제저녁 집 뒤편 언덕에서 벌건 불덩이가 운석처럼 집 마당에 떨어졌다"며 "대피하면서 피해가 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했다. 속초시 노학동 안준헌(66)씨의 게스트하우스도 전소했다. 안씨는 "어젯밤 타는 냄새에 눈을 떴고, 창밖이 빨갛게 보이는 걸 보고 급하게 몸만 피했다"고 했다.
대피소로 지정된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는 이날 저녁 원암리 주민 등 137명이 모여 있었다. 군청에서 텐트를 설치했지만 들어가 쉬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집이 얼마나 탔는지 이야기하다 한숨을 쉬고, 눈물을 터뜨렸다. 고성군 토성면 인흥리 주민 김상손(65)씨는 "어제도 밤을 새웠는데 걱정 때문에 누워도 잠이 안 온다"고 했다.
강원권 관광객이 많이 찾는 속초 한화리조트는 이날 하루 문을 닫았다. 불길은 본관 건물을 비껴갔지만 외부 식당 건물과 골프장 잔디 일부를 검게 태웠다. 리조트 바로 옆 드라마 '대조영' 세트장은 석조 건물을 제외한 모든 목조 건물이 불타 무너졌다. 리조트 워터파크는 7일까지 영업을 중단하기로 했다.
이번 불로 속초시 영랑동 주민 김모(59)씨가 숨졌다. 김씨는 4일 오후 8시쯤 고성군 토성면 용촌리에 혼자 사는 누나를 데리고 오겠다며 차를 타고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아내 김모(47)씨는 "연기가 너무 많이 나서 남편에게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누나를 혼자 둘 수 없다'며 길을 나섰다"고 했다. "중3 딸, 중1 아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김씨가 구하려 했던 누나는 연기를 마셔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해 이날 동생 빈소를 지켰다.
이날 고성군과 속초시의 모든 초·중·고는 휴업했다. 강릉시에선 초등학교와 중학교 각 1곳이, 동해에서는 초등학교 1곳이 휴업했다. 춘천지법 속초지원은 이날로 예정돼 있던 재판을 연기했다.
봄 관광 특수를 기대했던 동해안 지역 경제도 타격을 입었다. 강릉은 지난 2일부터 경포호 일원에서 경포벚꽃잔치를 진행 중이다. 지난해 15만 명이 찾은 강릉 대표 축제다. 올해도 7일까지 열릴 예정이다. 하지만 개막 이틀째인 지난 3일 강풍의 영향으로 축제가 하루 중단됐고, 4~5일 산불까지 겹쳤다. 강릉시 관계자는 "벌써 일부 음식점에선 주말 예약을 취소한다는 전화가 걸려온다고 한다"고 했다. 강릉시 옥계면 동해고속도로 옥계휴게소와 동해휴게소도 건물이 불에 탔다.
교동, 장사동, 영랑동 등 시내로 불이 번진 속초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생선회와 홍게를 먹으러 관광객이 찾는 속초 장사항(港)도 일부 상가 건물이 불에 탔다. 아스팔트 도로가 화염에 녹아내렸고, 가로수는 검게 그을렸다.
산림 복구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강효덕 강원도청 산림과장은 "정부로부터 산불 피해 응급복구비 40억원을 받아 고성·속초·강릉 10억원, 동해·인제 5억원씩 지급하기로 했다"면서 "옛 산림처럼 복원되려면 100년은 걸릴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