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넷플릭스가 애플의 스트리밍 서비스에 참여하는 일은 없을 거다."

1등 기업들의 물고 물리는 엔터테인먼트 전쟁이 시작됐다. 지난달 19일(현지 시각) 스마트폰 업계 1위 애플이 콘텐츠 스트리밍(실시간 재생) 서비스에 뛰어들겠다고 하자, 넷플릭스 CEO 리드 헤이스팅스가 견제구를 날렸다. 넷플릭스는 유료 회원이 1억3900만명이나 되는 동영상 스트리밍 업계 1위 기업. 헤이스팅스의 발언은 자사가 만든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등 오리지널 콘텐츠 900여 편을 애플에 제공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애플의 준비와 도전도 만만치 않다. 지난달 25일 미국 캘리포니아 본사에서 열린 발표회에서 팀 쿡 애플 CEO는 스티븐 스필버그, 오프라 윈프리, J.J. 에이브럼스, 리즈 위더스푼 등 할리우드 거물들을 대동하고 무대에 올랐다. 애플의 돈으로 영화나 드라마, 예능을 만들고, 이를 '애플TV 플러스'라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독점 유통하겠다는 게 이날 발표의 핵심이었다.

지금 스트리밍 서비스는 춘추전국시대다. 영화 업계 1위 디즈니도 올해 안에 스트리밍 서비스 '디즈니 플레이'를 내놓을 예정이다. 인터넷 검색 업계 1위 구글은 이미 자회사 유튜브를 통해 자체 제작한 영화·드라마 등을 유통 중이고, 인터넷 유통 업계 1위 아마존도 '아마존 프라임'을 통해 오리지널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각 업계에서 혈투 끝에 1위를 쟁취한 승자들이 콘텐츠 시장을 다음 전장(戰場)으로 선택하는 모양새다.

영화관 시장보다 규모가 더 크다

이번 전장은 크기가 조금 작다. 손바닥보다 그리 크지 않은 몇 인치짜리 스크린의 패권을 두고 혈투가 벌어질 조짐이다. 이유는 하나. 돈이 된다는 점이다. TV와 스크린 대신 스마트폰과 PC 화면이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세상이다. 5G 시대가 열리며 데이터 전송 속도도 비약적으로 빨라져 어디서나 편하게 볼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가 대세가 되고 있다. 지금 스트리밍 시장은 콘텐츠 시장 중 게임에 이어 둘째로 크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 규모는 약 426억달러로 작년 처음으로 글로벌 박스오피스(약 411억달러)를 넘어섰다. 블룸버그는 "영화 제작이 본업이던 디즈니나 아이폰·아이패드 판매가 한계에 다다른 애플 모두 성장 잠재력이 충분한 새 시장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게다가 스트리밍 시장은 현재 넷플릭스 이외에는 이렇다 할 강력한 경쟁자도 없는 것도 장점이다. 애플과 디즈니, 아마존이 수조원씩 투자해가며 스트리밍 서비스에 진출하는 이유다.

디즈니는 어벤저스·스타워즈 회수하고, 넷플릭스는 마틴 스코세이지 모셔오고

도전하는 디즈니·애플이나 지키려는 넷플릭스나 뺏고 빼앗기는 '킬러 콘텐츠(시장을 압도하는 강력한 콘텐츠)' 확보에 한창이다. 소수의 '킬러 콘텐츠'가 매출의 절대 비율을 차지하는 게 콘텐츠 시장의 특징이다. 미국 IT 매체 '리코드'에 따르면 작년 넷플릭스의 전체 콘텐츠 조회 수 중 42%를 불과 50개 콘텐츠가 차지했다. 디즈니도 작년 영화 흥행 수입 중 약 60%를 '블랙팬서' '어벤저스: 인피니티워' '인크레더블2' 등 단 세 편이 벌어들였다.

현재로선 디즈니의 킬러가 가장 든든하다. '어벤저스'로 대표되는 마블,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유한 루카스필름, 애니메이션 명가 픽사가 자회사다. 디즈니는 최근 20세기폭스를 합병해 '타이타닉' '아바타' 같은 대작과 '심슨 가족' 같은 마니아 콘텐츠까지 확보했다. 게다가 넷플릭스에 제공하던 자사 콘텐츠를 올해 안에 회수하겠다고 '확인사살'했다. 스마트폰으로 어벤저스 영화를 보고 싶으면 '디즈니 플레이'에 가입하란 얘기다. 넷플릭스에서 독점 공개했던 마블 히어로 드라마 '데어데블' '제시카 존스' 등 인기 콘텐츠도 도로 가져와 후속 시즌을 제작 중이고, 최초의 '스타워즈' 드라마 시리즈도 내년 공개를 선언했다.

넷플릭스의 수성(守成) 전략은 가상의 캐릭터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로버트 드니로·알 파치노 주연의 '아이리시맨', 마이클 베이 감독, 라이언 레이놀즈 주연의 '식스 언더그라운드'에 더해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피노키오'가 올해 출격한다. 용두사미란 평가로 스타일을 구긴 '하우스 오브 카드'나 너무 많이 만든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처럼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철학적 SF '블랙미러'나 샌드라 불럭 주연의 '버드박스' 등 새 효자 효녀가 속속 태어나고 성장하는 중이다.

디즈니·넷플릭스의 틈바구니에 낀 애플은 더 센 거물들을 영입한다. 선봉은 스티븐 스필버그다. 1980년대 큰 인기를 끌었던 SF 드라마 '어메이징 스토리'의 리메이크로, 스필버그의 장기인 2차 세계대전이 배경이다. '프렌즈'의 제니퍼 애니스톤과 영화만 찍던 리즈 위더스푼을 한데 모아 만드는 시트콤도 애플의 선택 중 하나. 차기 미국 대통령 후보로도 거론되는 오프라 윈프리도 애플과 독점 계약을 맺고 토크쇼를 만든다.

킬러만큼이나 중요한 게 게릴라

영화·드라마를 제외한 세상 모든 종류의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로 제국을 건설한 유튜브 역시 참전했다. 지난 3년간 오리지널 콘텐츠를 수십 편 제작했지만, 상대적으로 무게감은 떨어진다. 하지만 소수의 확실한 팬을 공략하는 다양한 '게릴라 콘텐츠'도 엔터테인먼트 전쟁의 든든한 무기다.

게릴라가 제일 많은 건 역시 유튜브다. 동영상 편집만 할 줄 알면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어 올릴 수 있는 사업 모델 덕분이다. 소위 '아스팔트 우파'의 시사 방송과 예쁜 아기들의 먹방 영상이 공존하고, 변방의 무명 보이그룹이나 웃기는 춤을 추는 가수도 순식간에 팝스타로 만들어줄 수 있는 마당이 유튜브다. 작년 기준 매달 평균 18억명이 유튜브로 영상을 봤다. 이 어마어마한 이용자들을 서서히 오리지널 콘텐츠도 소비하게 만들겠다는 게 유튜브의 전략이다. 2년 전 시작한 정액제 서비스 '유튜브 프리미엄'(월 8690~1만1500원)에 가입하면 광고 없이 영상을 볼 수 있는 혜택을 주면서 동시에 자체 제작 영화·드라마도 볼 수 있게 해준다. 일종의 '미끼 혜택'으로 자사 콘텐츠 소비를 유도하는 셈이다. 게다가 세계 각지에서 쌓은 시청 데이터를 활용한 맞춤형 콘텐츠 제작에도 서서히 박차를 가하고 있다. K팝이 전 세계 10대들에게 인기가 많다는 걸 포착하고 한국 아이돌 가수를 기용해 '톱 매니지먼트'라는 한국 드라마도 제작했다.

넷플릭스도 열심히 게릴라를 양산 중이다. 세계 각국의 특색 있는 콘텐츠를 발굴해 제작한다. 일본에선 '고질라' '울트라맨' 같은 소위 '덕후(마니아를 뜻하는 은어)' 애니메이션 제작에 돈을 대고, K팝 아이돌을 기용해 한국 예능과 드라마를 만들기도 한다. 좀비물에 한국 사극을 결합한 '킹덤' 같은 작품에 제작비 120억원을 쏠 수 있는 것도 지금까지는 넷플릭스만 시도했다. '킹덤' 덕분에 아마존에선 난데없이 드라마에 나온 조선시대 갓과 호미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도 했다. 미국적 콘텐츠만 보유하고 있는 디즈니나, 후발 주자인 애플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콘텐츠 시장의 절반을 킬러 콘텐츠가 가져간다면 나머지 절반의 다양한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다양한 콘텐츠를 공략하는 것도 좋은 전략"이라며 "할리우드 인력에 지나치게 의존적인 디즈니와 애플로서는 넷플릭스나 유튜브의 전략을 곧바로 모방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시청자들은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넷플릭스 하나로 다 볼 수 있는 게 편하지 않아?" "그러다 넷플릭스가 요금 올리면 어쩌려고?"

엔터테인먼트 전쟁을 지켜보는 시청자 머릿속은 복잡하다. 각 회사가 다른 회사 서비스에 자사 콘텐츠를 제공하지 않을 거라고 뚜렷하게 밝혔기 때문에, 모두 원한다면 3~4개씩 가입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회사원 이창훈(37)씨는 현재 넷플릭스는 물론, 유튜브 프리미엄과 한국에서 정식 서비스 하지 않는 '아마존 프라임'까지 가입해 한 달 이용료만 4만원이 넘는다. 이씨는 "아마존에서 만드는 '높은 성의 사나이' 드라마가 너무 보고 싶어 울며 겨자 먹기로 미국 계정을 만들어 가입했다"며 "어벤저스나 스필버그가 만드는 드라마도 보고 싶은데 그러면 스트리밍 서비스를 5개나 가입해야 하는 거냐"고 푸념했다. 미국 IT 매체 '와이어드'는 "여러 콘텐츠가 각 회사의 서비스로 쪼개진 상황에선 꼭 보고 싶은 한두 작품을 보려고 서비스에 잠깐 가입했다가 다 보고 탈퇴하는 이도 늘어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반면 경쟁이 결국 시청자들에게 득이 될 거란 지적도 많다. 넷플릭스같이 정액제로 매출을 올리는 회사가 독점 사업자가 되면 마음대로 요금을 올려도 시청자로선 대안이 없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지난 1월 창업 후 가장 큰 폭(13~18%)으로 요금을 올렸다. 이에 월스트리트저널 등 현지 매체들은 "넷플릭스가 시장 지배력을 서서히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했다. 하지만 올해 안에 출시될 디즈니나 애플의 스트리밍 서비스가 넷플릭스보다 낮은 요금을 매긴다면 넷플릭스로서도 요금을 마냥 높게 책정하기 어렵다. 영국의 시장조사 기관 '컴펠로'는 "가입·탈퇴가 쉬운 월정액제 특성상 경쟁자가 조금이라도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 큰 압박으로 작용할 것"이라며 "반대로 애플과 디즈니 역시 넷플릭스·유튜브와 비슷한 수준의 요금을 책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뭉치면 이길 수 있을까? 국내 포털·통신·방송사 위기감

넷플릭스, 1년만에 4배 성장
SKT 스트리밍 서비스 '옥수수'
지상파 3社의 '푹'과 통합키로

코끼리에 밟히는 개미가 될 것인가,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이 될 것인가.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공세에 이어 디즈니, 애플 같은 초대형 기업들이 콘텐츠 시장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하면서 국내의 플랫폼 기업, 특히 포털 사이트와 통신사·방송사들이 바빠졌다. 기술과 자금력은 물론, 브랜드 파워 면에서도 비교가 어려운 글로벌 거대 기업들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리라는 우려다.

앱 분석 업체 와이즈앱에 따르면 국내 넷플릭스 이용자(안드로이드 기준)는 작년 1월 34만명에서 12월 127만명으로 1년 만에 4배 가까이 급증했다. 작년 한 해 넷플릭스가 한국서 올린 매출은 1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방송·영화 시장 규모가 약 20조원임을 고려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성장세가 심상치 않다. 여기에 애플은 국내 스마트폰 시장의 30%가량을 점유하는 아이폰을 등에 업고 있고, 디즈니는 한국에서 수천만 명의 관객을 모은 어벤져스 시리즈를 보유한 회사다.

대책은 합종연횡이다. SK텔레콤은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옥수수'를 지상파 3사가 공동 운영 중인 스트리밍 서비스 '푹'과 통합하기로 했다. SK는 지상파의 콘텐츠를 수혈받고, 지상파는 SK의 자금력을 콘텐츠 제작에 활용할 수 있을 거란 계산에서 나온 전략적 제휴다. LG유플러스는 넷플릭스와 손잡았다. 자사가 운영 중인 IPTV에서 별도 조작이나 기기 연결 없이 넷플릭스를 볼 수 있게 했다. LG는 지난 2월 넷플릭스 자체 제작 한국 드라마 '킹덤'이 공개됐을 때 평소 대비 가입자 수가 3배 이상 폭증하는 등 효과를 톡톡히 누리기도 했다. 또한 LG는 CJ가 운영하던 스트리밍 서비스 '티빙'과의 전략적 제휴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스트리밍(Streaming)

음성이나 영상을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기법. '흘리다'라는 뜻으로, 멀티미디어를 물 흐르는 것처럼 다운로드와 동시에 재생하는 방식이다. 현재 동영상 세계 1위 기업은 넷플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