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인문학도 몸값이 최근 5년 새 크게 치솟고 있습니다. 기술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다 역풍 맞은 IT(정보기술) 기업이 잇따라 나오면서 철학·윤리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는 중이지요."

지난달 세계 최대 과학자 모임인 AAAS (전미과학진흥협의회) 연례 회의장에서 만난 카네기멜런대 데이비드 댄크스 교수에게서 들은 답변이었다. "한국에선 인문학 전공자가 취업 안 되기로 유명하다"는 나의 푸념에 댄크스 교수는 "IT가 돈 되는 산업으로 성장하며 한때 인문학도는 찬밥 신세였지만 지금은 세상이 달라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고 소개했다. 희망을 보는 듯했다.

지난달 워싱턴 DC에서 열린 전미과학진흥협의회(AAAS) 연례 회의의 'AI의 사회적 영향' 토론장이 참석자들로 붐비고 있다. 앞줄 맨 왼쪽이 장소연 탐험대원.

워싱턴 DC에서 열린 이번 과학자 모임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인공지능(AI)의 사회적 영향'의 토론자로 참석한 그는 철학자다. 실제로 숫자·실험·공식 등이 '이과적'으로 오갈 줄 알았던 이 과학자 모임에는 철학·종교·정치학 같은 인문학이 당당한 주인공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나는 영어 통·번역 전공자로 행정학을 부전공했다. 요즘 유행하는 '문송하다'(문과라서 죄송하다)란 말의 문제적 주인공인 바로 그 문과생이다. 하필 컴퓨터와 인터넷이 이끄는 이른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인문학을 전공하게 된 나는 졸업을 앞두고 막막함을 느꼈다. 그러던 중 과학·기술의 최첨단을 만날 수 있다는 AAAS 연례회의의 올해 주제가 '경계를 허무는 과학'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미국으로 향했다. 과학을 둘러싼 테두리가 무너진다면 인문학으로도 과학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다는 뜻 아닐까. 인문학도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살아남는 법에 대한 답을 찾아 나섰다.

Q1: 인문학도가 할 일 있긴 있나

A: 카네기멜런대 댄크스 교수 "잇단 윤리 역풍에… '철학과 急求' 첨단기업 전화 쇄도"

철학과 교수로서 AI의 윤리 문제를 오래 연구해온 댄크스 교수는 AI 윤리 토론회에서 "결국 관건은 믿음"이라는 논지를 펼쳤다. 인류가 AI를 얼마나 받아들이는지는 '믿음직함'에 달렸다는 얘기였다. 아, 심오하여라(=어려워라!)

그는 "이런 머리에 김 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질주하는 IT 시대에 철학자의 역할"이라고 했다.

앞만 보고 달리는 기술이 역풍을 맞는 일이 잇달아 발생하자 거대 기업들은 '제동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실제로 구글 AI 기술을 미 국방부가 살상무기에 활용하려 하자 구글 기술자 수천 명이 사표를 제출하고, 마이크로소프트(MS)의 안면 인식 AI가 시민 감시에 쓰인다는 비난이 거세져 MS가 윤리위원회를 시급히 설치하는 등 윤리와 기술의 충돌은 최근 첨예한 이슈로 떠올랐다.

댄크스 교수는 "몇 년 전까지, 자료 수집을 하려 IT 회사에 전화하면 받기는커녕 콜백도 안 왔다. 요즘은 자기들이 애타게 전화를 걸어온다"고 했다. "철학 전공자를 급히 채용하고 싶으니 연결해 달라는 요청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인문학자들의 몸값이 확 올라가는 느낌이랄까요, 하하. 단, 하나 조건은 있습니다. IT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정도는 갖춰야지요."

Q2: 문·이과 단절된 한국 어떤가

A: 스탠퍼드대 에버하트 교수 "한국에선 한번 문과면 평생 문과? 오, 와우! 오, 노! "

댄크스 교수의 마지막 조언은 나를 고민에 빠뜨렸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문과를 선택한 이후, 과학·기술이나 컴퓨터 공학 등엔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세계 최고 대학 중 하나인 스탠퍼드대 심리학과 제니퍼 에버하트 교수를 붙잡고 내 고민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언어학자·컴퓨터공학자와 함께 캘리포니아주(州) 경찰이 각 인종을 대하는 방식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냉철한 학자 스타일인 그는 "한국선 고1 때 문과 혹은 이과를 선택하고 그 길로 대부분 쭉 간다"라고 했더니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오, 와우! 오, 노!(세상에, 저런!)"라고 소리쳤다.

그는 학제 간 융합을 지향하는 스탠퍼드대의 프로그램 '심볼릭 시스템'을 소개하면서, 문·이과 경계는 점점 낮아져야 한다고 했다. "인공지능, 지속 가능한 발전, 로봇, 인간의 정체성 등등 이 세상의 문제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최대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각도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기술이 치우칠 위험이 있지요." 이런 협업이 스탠퍼드라 가능한 일 아닐까. 그는 늦지 않았다는 격려를 덧붙였다. "요즘은 전에 없이 온라인 교육이 활성화돼 있습니다. 인문학도가 과학·기술 기본 지식을 습득하기 훨씬 쉬워진 세상이죠!"

Q3: 과학, 인문학 얘기 들어줄까

A: 국제인권단체 웨어럼 국장 "창백한 백인 주류과학, 인류 위해 인문학과 通하라"

AAAS에서 (과학 분야가 아닌) 노벨 평화상 수상자를 만난 건 의외였다. 1997년 '국제 지뢰 금지 운동'으로 수상(공동)한 메리 웨어럼 국제인권단체 국장은 '킬러(살인) 로봇' 세션에 토론자로 참석해 반대 의견을 밝혔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로봇 회사 CEO와의 토론에서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토론회가 끝나고 나서 그를 잡고 물었다. "자동화 로봇 같은 엄청 전문적인 분야에 인문학자가 할 일이 많나요?" 그는 "당연하다"면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공학자들의 '스펙'은 너무 비슷비슷해요. 창백한 모범생 스타일 백인 남성(pale, male, stale)이 대부분입니다. 킬러 로봇처럼 인류의 미래에 큰 영향을 줄 기술의 개발을 그토록 비슷비슷한 집단에 맡길 순 없습니다. 우리는 이 논의를 하기 위한, 최대한 다양한 구성원을 모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다양한 국적·성별·인종 및 전공자들이 참여해야 합니다."

과학자 입장도 궁금했다. 그들은 인문학자 이야기를 들으려 할까. 저명한 천체물리학자이자 AAAS의 '과학·윤리·종교 위원회'를 이끄는 제니퍼 와이즈먼 박사에게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과학자는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연구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습득한 지식을 어디에 써야 할지는 잘 몰라요. 이를 인류에 유익하게 활용하는 방법엔 미숙하다고나 할까요.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 전문가 인문학자들이 도와줘야 합니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유전자 가위'라고도 불리는 크리스퍼(CRISPR)의 종교적 의미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한 제임스 피터슨 버지니아 공대 교수(종교학)와의 대화가 계속 떠올랐다. 그는 성경 말씀을 재료로 유전공학을 설명했는데, 강연장이 좁아 두 개의 방을 터야 했을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다. 그는 '한국 인문학도의 취업 고민'에 "별걱정을 다 한다"며 미소 지었다.

"문·이과의 경계가 생기고 과학과 종교가 다른 분야로 여겨진 건 그리 얼마 안 됐습니다. 유럽 초창기 대학들(볼로냐대·파리대·옥스퍼드대 등)은 모두 성직자들이 세웠고, 설립 후 과학과 종교, 철학과 기술을 두루 가르쳤습니다. 모든 학문은 원래 통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