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경남 진주를 중심으로 시외버스와 시내버스를 운영하는 이 팔순의 사장님은 연구 대상이다. 얼마 전까지 진주~서울 시외버스 요금(우등 기준 2만4400원)을 고속버스(2만7000원)보다 싸게 정했다. 고급 차만 배정했고 서울까지 최단 거리로 달려 고속버스보다 20분쯤 먼저 도착하도록 했다.
끝이 아니다. 조옥환(87·남명학진흥재단 이사장) 부산교통 대표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을 기리는 일이라면 40년 넘게 발벗고 나선다. 그동안 수백억원을 썼다. 1970년대 중반부터 남명 관련 기록을 발굴하고 선양하는 일을 꾸준히 후원했다.
"문중 일이라믄 길어야 2~3년 하다 치아 삐렸겠지요. 내가 재벌은 아이지마는 돈이 안 아깝지예."
남명 조식은 퇴계 이황과 동시대를 살았다. 임금이 벼슬을 숱하게 내렸지만 다 물리쳤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려 국정을 호되게 비판했다. 임진왜란 중 영남 3대 의병장 곽재우·정인홍·김면이 모두 그의 제자다. 최근 40년 사이 국사(國士)급으로 재발견한 선비다.
그가 말년에 후학을 기른 경남 산청 산천재(山天齋)와 덕천서원 등 유적지는 1983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됐다. 1990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남명이 처음 등장했다. 2012년 서울대에 5억원을 기부해 '남명학시민연구기금'이 만들어졌다. 사단법인 남명학연구원, 경상대 남명학관, 산청 한국선비문화연구원…. 한 인물에 대한 연구가 단기간에 이만큼 폭증한 배경에는 '후원자 조옥환'이 있었다.
기업인들은 말한다. 단번에 100억원을 내놓을 순 있어도 해마다 10억원씩 내라면 못 한다고. 그런 정신으론 회사를 운영할 수 없다고. 조 대표는 달랐다. 남명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지갑을 열 사람이다.
지난 13일 산천재에서 그를 만났다. 보청기를 끼고 있었지만 요즘도 지리산 천왕봉에 오를 만큼 근력이 짱짱했다. 450년 전 남명이 심었다는 매화나무(남명매)는 어김없이 꽃을 피웠다. 하늘은 푸르렀다. 멀리 눈을 이고 있는 천왕봉이 봄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장작 판 돈으로 운수업 일궈
―남명은 왜 지리산으로 들어왔을까요.
"남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잖아요. 지리산의 기상을 닮고 싶어 한 것 같습니다. '천석종(千石鐘)'이라는 시에서 남명이 이렇게 읊었어요. '하늘이 울어도 지리산은 울지 않는다. 그렇게 큰 산이 되고 싶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공간이었겠지요."
―부산교통은 창업이 1963년이더군요.
"운수업에 발을 들인 지는 60년이 넘었습니다. 지금은 버스가 400대쯤 되고요. 제가 1932년생입니다. 6·25전쟁 때 군대에 갈 둥 말 둥 한 나이였지요. 진주에서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먹고살려고 장사를 했어요."
―고교생이 장사를요?
"소금을 팔았는데 신통찮았고 장작 장사로 돈을 모았어요. 당시에는 연료가 다 산에 있었습니다. 못사는 사람은 솔가지를, 형편이 나은 사람은 장작을 땠지요. 1950년대 중후반에 야간대학(경남대의 전신인 해인대학)에 다닐 때 군용 트럭 싸게 산 게 운수업의 시작입니다."
6·25는 끝났지만 지리산에서는 역설적으로 그 무렵 전쟁이 시작됐다. 빨치산 토벌 작전이 1963년까지 이어졌다. 덕천서원에 토벌대 본부가 있었다고 한다. 조옥환씨 트럭도 징발돼 군경을 전투 지역에 실어 나르곤 했다. 전쟁 통에 웬만한 야산에선 없어진 나무가 지리산에는 많았다. 도벌(盜伐)이 흔했다. 후생 사업 비리를 막으려고 이승만 대통령이 군경의 도벌을 단속하자, 조씨에게 장작을 내다 파는 일감이 몰렸다.
―트럭을 직접 몰았나요.
"품삯을 주고 운전사를 고용했어요. 기름도 귀해 공군 부대에 들어가 주유했지요."
―장작을 팔아 얼마나 벌었습니까.
"가득 싣고 마산으로 달려갔어요. 어촌 사람들은 멸치를 팔아 땔감을 샀습니다. 장작이 불티나게 팔렸지요. 하하하. 갈 때마다 거의 20배가 남았습니다. 마대를 사서 돈을 쓸어 담았어요."
―버스 회사는 어떻게 시작했나요.
"제가 화물차 경험이 있어 삼남교통 면허를 받았어요. 1963년입니다. 개인 사업자 여럿이 지입차(持入車)를 투입해 회사를 굴렸는데 저는 흑자가 나고 남들은 적자가 났지요. 경험 차이였어요. 제가 버스를 하나둘 사들여 대표를 맡게 됐고 1972년에 부산교통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진주 사람들은 부산교통을 '가장 좋은 버스, 가장 싼 요금'으로 기억합니다. 왜 손해 보는 일을 하셨나요.
"고향이 산청이고 진주에서 고학했잖아요. 주말에 산청 장작을 싣고 와서 진주에서 팔았지요. 손해가 아니고 이만큼 사업 일군 데 대해 제가 할 수 있는 보답입니다. 진주~서울 노선은 저희가 가격을 확 낮추니까 고속버스 업체들도 따라올 수밖에 없었어요. 우리 시외버스 탄 승객이나 다른 고속버스 탄 승객이나 똑같이 덕을 본 거예요. 10년 전에 '부산교통 운행 인가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이 제기돼 대법원까지 가서 승소했습니다.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요금을 낮게 받는 건 죄가 아니지요."
"집안 어른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광해군이 쫓겨났다. 서인(西人) 세상이 열렸다. 그들은 적폐를 청산한다며 남명 문하이던 북인(北人)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조선 후기에 북인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을 잃었다. 조옥환씨는 창녕 조씨다. 외가는 남명의 제자인 동강 김우옹의 후손이다.
―어릴 적에 남명에 대해 듣고 자랐나요?
"그분에 대한 기억은 딱 두 가지입니다. 아버지와 외삼촌들이 '퇴계 선생처럼 (남명을) 숭모하지 못해 억울하다'고 하셨어요. 또 하나는 그분 제사 때 묘소에 가면 떡을 제일 많이 줬어요. 일제강점기이고 배고픈 시절 아닙니까. 일부러 찾아갈 정도였지요."
―남명이 누군지도 몰랐고 '억울하다'와 '떡'만 기억에 남았군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요(웃음). 남명이 그저 이 지역에서 실력이 뛰어난 접장(接長·큰 서당에서 훈장을 도와 가르치거나 양반집 자제를 지도한 선비)이겠거니 했어요. 그러다 고려대 김충렬 교수가 남명에 대해 연구해 쓴 책을 보고 궁금해서 진주로 그를 초청했습니다."
―김 교수가 뭐라고 하던가요.
"실록에서 '단성소'를 읽고 관심을 기울였다고 했어요.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상소입니다. 김 교수는 또 '임진왜란 때 큰 의병장은 모두 남명의 제자다. 퇴계 밑에는 없다'고 했지요.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명을 기리는 사업은 그날 시작된 거예요."
단성현감사직소(丹城縣監辭職疏)를 줄인 '단성소'는 1555년 명종이 단성현감으로 제수하자 남명이 사직하며 올린 글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가 득세하여 나라가 근본부터 썩었다고 직언했다. 문정왕후를 '과부'라 하고 임금을 '고아'라 칭했다. 명종이 남명을 벌하려 했으나 조정 신하들이 만류했다.
―1976년부터 40여 년간 남명을 현창하는 일에 얼마를 쓰신 겁니까.
"수백억원이라고 해두지요. 남명이 그냥 큰 접장 정도였다면 비 세워주고 말았을 거예요. 깊이 알면 알수록 집안의 큰 어른이 아니라 나라의 큰 어른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이 왜 억울하다고 했는지 알겠더라고요. 퇴계나 율곡은 대한민국 지폐 속 인물 아닙니까. 남명은 아무도 몰랐어요. 퇴계와 붙어도 조금도 지지 않을 분입니다."
―남명의 선비 정신, 핵심이 뭔가요.
"민본주의와 실천입니다. 말단 한직이라도 받는 걸 영광으로 알던 시대인데, 남명은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지요. 퇴계가 이론을 강조한다면 남명은 실천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이론에 매몰된 학자들을 향해 '손으로는 빗자루질 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론 하늘의 이치를 논한다'며 꾸짖었지요. 국난을 염려하며 제자들에게 병법과 천문, 의약을 가르쳤습니다. 과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 50여 명이 그 문하에서 배출돼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어요.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는 뜻입니다."
―맨주먹으로 일군 사업인데 후원금이 아깝지 않았나요.
"이 어른은 민족의 스승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재벌은 아니지만 지금도 돈이 안 아까워요(부산교통은 진주에서 자산 규모로 20위쯤 된다고 한다)."
―가족도 지지했나요?
"집에서는 반대했죠. 자꾸 돈 갖다 쓰니 '뭐 한다고 그리 합니까?' 하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니 그때부터는 말을 안 하데요."
―가장 큰 보람을 느낀 순간이라면.
"이 일대 남명 유적지가 1983년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날입니다. 그 뒤로 남명이 교과서에 실렸고 한국의 대표적 사상가 10인에도 꼽히게 됐지요. 역사의 곡절 끝에 묻힌 위대한 선비를 발굴한다는 심정으로 이 일을 해왔습니다."
민생을 살피면서 직언하는 지식인
정신을 기부하는 기업가도 필요하다. 남명을 선양하는 일과 버스 회사 운영에 공통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조옥환 대표는 "사람을 목적지로 데려간다는 점이 비슷하다"고 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회의적인 순간도 있었을 텐데요.
"돈이 들어가니까 초기에만 잠깐 그랬어요. 퇴계 못지않은 대단한 선비라는 얘기를 듣고부터는 의심을 거뒀습니다. 자신감이 생겼어요. 국가가 남명의 선비 정신을 기리는 일을 함께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목표의 70%쯤 온 것 같습니다. 남명이 세상을 뜨자 선조(재위 1567~1608)가 제문(祭文)을 내린 거 아시나요?"
―처음 듣는 얘깁니다.
"제문을 번역해 내자는 걸 처음엔 제가 막았어요. 남명과 퇴계, 율곡이 모두 선조 때 돌아가시지 않았습니까. 남명은 벼슬도 여러 번 거절했는데 공연히 출판했다가 퇴계에게 내린 제문과 비교될까 봐 싫었어요."
―그런데요?
"제문이 너무 좋다는 겁니다. 남명학연구원을 거친 신병주·한명기 교수에게 선조가 퇴계에게 내린 제문 좀 찾아달라고 했지요. 아무리 찾아도 기록이 안 나와요. 선조실록에도 퇴계문집에도 없었습니다. 율곡에게 내린 제문도 없고요."
―선조가 남명에게만 제문을 내린 건 그만큼 인정받는 선비였기 때문인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선조는 제문에서 '다른 사람들은 세속에 아부했지만 남명 선생은 변절하지 않았다. 소자(小子)는 누구를 의지하고 백성들은 또 누구에게 기대겠는가?'라고 애도했습니다. 학자로서 당대 위치가 그랬던 거예요."
―2001년 남명제 때 퇴계 집안이 찾아온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영남 유림에는 '좌 퇴계, 우 남명'이라는 말이 있어요. 두 문중이 뜻을 모아 윤리와 도덕이 실종된 사회를 바로잡고자 노력하자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남명은 허리에 '항상 깨어 있으라'며 방울과 경의도(敬義刀)라는 칼을 가지고 다녔다지요.
"경(敬)은 자신을 안으로 다스리는 것, 의(義)는 밖으로 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단성소'로 보여줬듯이 현실 문제를 지적하고 행동할 줄 안다는 점에서 이 시대에도 쓸모 있는 학문이에요."
―남명이 살아 있다면 세상을 향해 뭐라고 일갈했을까요.
"글쎄요. 어느 시대나 모순이 있기 마련이지만 요즘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 아닌가 싶어요. 빈부 양극화가 심해졌잖아요. 기업가도 애로가 많습니다. 정책적으로 서민을 돕는 건 좋은데 너무 속도를 내다 보니 중소기업은 타격이 이만저만 아녜요. 그래서 최근에 요금을 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남명에게 뭘 배워야 할까요.
"권력과 거리를 두고 민생의 고통을 살피면서 직언하는 지식인의 모습 아닐까요."
현실 정치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근로시간을 탄력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특례 업종에서 버스 운수업을 제외한 것, 주 52시간 근로제 등을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그가 평소 좋아한다는 문장을 들려줬다. '선을 좇는 일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고 악을 좇는 일은 무너지는 것과 같다(從善如登 從惡如崩).' 좋은 일을 배우기는 어렵지만 나쁜 일을 배우기는 쉬우니 경계하라는 뜻이다.
남명 조식은 출세를 멀리하고 초야에 묻힌 채 파당 정치와 외척의 적폐를 꾸짖은 선비였다. 벼슬 중 으뜸은 정권이나 국민이 주는 벼슬이 아니라 역사가 주는 벼슬이라고 한다. 남명은 이상한 버스 회사 사장의 집념과 후원으로 망각에서 벗어났다.
오는 25일 시작될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겹쳐졌다. 불미스러운 과거와 의혹이 솟아오르고 있다. 북한 편향 발언, 부동산 투기, 꼼수 증여, 황제 병역, 위장 전입…. 그럼에도 왜 장관 자리에 목을 매나. 청문회에 나오기 전 '단성소'를 일독할 일이다.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조선 중기 실천성리학의 대가. 이론에 매몰된 당시 학문적 편협성을 지적하며 민본과 실천을 강조했다. 벼슬을 사양하며 국왕에게 직언한 '단성소'는 오늘날까지 회자된다. 국난에 대비해 병법과 천문도 가르쳤고 제자 50여 명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는 등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