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님이 요청하신 보고서 준비됐습니다.'
최근 판교에 있는 IT 회사에 경력 입사한 강지은(33)씨는 '호칭' 문제로 애를 먹고 있다. 이곳은 수평적 조직 문화를 만든다며 영어 이름으로 서로 부르게 하는데, 윗사람 이름을 부르기가 여간 어색한 일이 아니어서다. "말은 편하게 부르라고 하는데 회사 분위기가 전혀 그렇지 않아요. 주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저는 어렵고 어색할 때가 많아요."
호칭만 달라졌을 뿐 실제 직원 간 소통 정도나 수준 역시 강씨가 이전에 일하던 중견기업과 비슷했다. 강씨 또래 직원들도 회사 내 서열이 높은 사람들에게 '님'자를 붙여 '피터님, 제이슨님' 식의 호칭을 쓰고 있었다.
판교인들의 일상을 진솔하게 담았다는 평을 듣는 장류진씨의 최근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에도 수평 호칭 사례가 나온다. 판교에서 수년간 기획자로 일한 장씨의 경험이 녹아있는 얘기다. "영어 이름만 부르고 존칭은 생략하기 때문에 연장자가 말을 놓기 쉽다는 점이었다. 나는 본명이 김안나라서 영어 이름도 그냥 'Anna'로 하고 입사했더니 여기저기서 안나, 안나거리면서 은근슬쩍 말을 놓는 통에 불릴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일상의 자아와 분리 가능한 새로운 영어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 예를 들면 올리비아라든지."
스타트업이나 IT 업종에 근무하는 이 상당수가 강씨나 소설 속 안나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영어 호칭을 사용하지만 실제론 뒤에 '님' 같은 말이 붙거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대화 내용은 더 공손하게 꾸미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 또는 이런 상황을 피하려다 보니 아예 대화가 단절되거나.
관련업 종사자들 중엔 '스타트업은 수평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이도 많다. 수평 호칭 등은 그런 강박에서 나온 일종의 전시 도구일 뿐이라는 얘기다. 판교의 한 IT 기업에 다니는 사원은 "내부에선 수평 호칭을 쓰다가도 외부에서 고객사를 대할 땐 직급을 얘기하는 이원화 문화가 있는 회사도 있다"며 "호칭의 어색함 탓에 관리자와 두 마디 할 것을 한마디 하고 몰아서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난해 말 IT 서비스 기업 M사는 수평 호칭 제도를 없앴다. 선후배를 구분하고 직급 뒤에 님을 붙여 '대리님, 과장님'이라고 부르는 예전 방식으로 고쳤다. 회사 관계자는 "수평 호칭으로 기대했던 효과나 문화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다.
수평 호칭이 IT나 스타트업에 한정된 얘기는 아니다. 국내 기업 중 수평 호칭 제도를 처음 도입한 것은 CJ. 이 회사는 지난 2000년 '님'이라는 호칭제를 도입했다. 이재현 회장을 '이재현님' '재현님'이라고 부르는 식이다. 20년간 수평 호칭을 쓰면서 회사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도 있지만, IT 회사들이 겪는 '호칭만 수평'과 같은 문제에 여전히 시달린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대학가에서도 최근 수평 호칭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최근 대학에선 후배가 선배에게 '영수씨, 영희씨' 같은 호칭을 쓴다고 한다. 예전에도 재수 등 탓에 나이는 많은데 학번이 낮은 경우 등에 서로 '○○씨'라고 부르는 경우는 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이런 표현이 나이와 상황에 관계없이 대중화됐다는 것이다. 성균관대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각별하거나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선배라는 호칭보다는 ○○씨라고 듣는 경우가 더 많다"며 "최근에 입학한 이들일수록 이런 성향이 짙다"고 했다.
전에는 학과나 학부 중심으로 수업이 이뤄져 다른 학과 학생끼리 교류가 적었지만 복수 전공 제도가 정착하며 다른 학과 학생들과 접촉이 많아진 것이 이유로 꼽힌다. 조별 과제 등으로 전혀 모르는 이들과 팀을 형성해 과제를 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씨라는 호칭이 나온다는 것. 한 대학생은 "서로 나이를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궁금하지도 묻고 싶지도 않다"며 "○○씨라고 하는 것이 대외적으로도 옳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를 두고는 다양한 목소리가 나온다. 선후배 간 벽이 느껴지는 데다 대학이 취업 준비 과정으로 전락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얘기가 있는가 하면, 서열 없는 평등 의식이 자리를 잡는 과정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서울시교육청이 교사, 학생 등 구성원 사이 호칭을 '○○쌤'이나 '○○님'으로 부르는 방안을 내놨다가 후퇴한 일도 있었다. 수평 호칭을 통해 직위와 직급 구분을 없애고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지만, 일각에서 학교 현장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진 것.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사제 간이 아니라 교직원 상호 간 호칭에만 적용되는 것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수평 문화가 있는 곳에 수평 호칭이 있는 경우가 있지만, 반대로 수평 호칭이 있다고 그런 문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라며 "호칭은 나이와 대우 등 여러 사회적 의미를 띠고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도 필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