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최은경 특파원

"고슬고슬한 밥, 찰기가 있는 밥 어떤 걸 좋아하시느냐에 따라 추천하는 쌀이 달라요. 요즘 인기 있는 쌀은 시마네현(島根縣)에서 나온 '오후쿠마이(お福米·복이 담긴 쌀) 고시히카리'예요. 복(福)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서 선물용으로 잘 나갑니다."

지난 4일, 일본 도쿄의 식품·잡화점 '아코메야 도쿄 긴자 본점' 한편에는 작년에 수확된 전국 각지 쌀 18종이 뷔페 음식처럼 나무 상자에 담겨 진열돼 있었다. 니가타현(新潟縣) 우오누마 고시히카리, 홋카이도(北海道) 유메피리카(아름다운 꿈), 야마가타현(山形縣) 쓰야히메(윤기 공주) 등 일본 내에서 유명한 이른바 '브랜드 쌀'을 모아 판매하는 곳이었다. 쌀통마다 산지·이름은 물론 각 쌀로 지은 밥이 어떤 특징을 갖는지가 그래프로 표시돼 있다. 밥이 고슬고슬한 편인지 아니면 쫄깃한 편인지, 동시에 꼬들꼬들한 편인지 부드러운 편인지를 알 수 있다. 오후쿠마이 1㎏을 고르자, 다음은 정미(精米) 수준을 고르라고 한다. 현미부터 백미까지 다섯 단계 중에서 원하는 정도를 손님이 선택하면 그 자리에서 쌀을 깎기 시작한다. 2018년 수확한 시마네현산 오후쿠마이 고시히카리 1㎏을 오분도(五分度) 정미 쌀 가격은 1080엔(약 1만1000원). 일본에서도 비싼 편이다. 맛있는 밥, 취향에 맞는 밥을 위해 유명 브랜드 쌀 편집숍을 찾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

◇일본은 지금 '브랜드 쌀 전국시대'

일본에선 2018년을 '브랜드 쌀 전국시대'라고 한다. '브랜드 쌀'이란 특정 지역에서 생산된 특정 품종 쌀을 브랜드화한 것을 말한다. 1944년 품종 개발 이후 줄곧 일본 최고 쌀로 꼽혀온 니가타현의 고시히카리가 원조 격이다. 지난해 새로 출시된 브랜드 쌀 숫자는 52종으로 크게 증가했다. 상표 등록된 브랜드 쌀은 총 795종으로, 2009년에 비해 약 250종 늘었다.

도야마현에서 '후후후(富富富)'란 새 쌀의 홍보 모델로 기용된 인기 여배우 기무라 후미노.

경쟁도 치열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야마현(富山縣)은 올해 '후후후(富富富·도야마의 앞 글자를 세 번 반복해 웃는 소리를 형상화)'라는 새 쌀을 출시하면서 홍보비로 2억5000만엔을 썼다. 지난해 10월 미쓰코시 백화점 니혼바시 본점에서 이시이 류이치 도야마현지사가 직접 나와 '후후후'의 출시를 알리는 기념 행사를 열었다. 직접 만든 요리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화제를 모았던 인기 여배우 기무라 후미노를 홍보 모델로 섭외해 CF도 찍었다. 후쿠이현(福井縣)은 이에 질세라 새 브랜드 쌀 이치호마레(가장 자랑스러운 쌀)에 홍보 예산 3억엔을 투입했다. 후쿠이 출신 가수 이쓰키 히로시를 모델로 기용했다.

일본곡물검정협회가 발표하는 '맛있는 쌀 랭킹'에 출품된 브랜드 쌀 종류도 154개로 1971년 실시 이래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이 협회는 향기, 맛, 끈기 등 6가지 항목에 대한 점수를 매겨 '특A'부터 'B―'까지 총 5개 등급으로 분류한다. 니가타 고시히카리의 경우 1989년 출품 이래 2017년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 '특A' 등급 판정을 받았다. '특A'로 분류되면 일본 최고 쌀로 인정을 받는다.

◇고급 브랜드 쌀 대거 출시, 제3의 물결

일본 정부가 1969년 각 산지가 쌀에 자체 브랜드를 만드는 것을 허용한 뒤로 유명 곡창 지대들은 각자 자체 브랜드 개발에 나섰다. '브랜드 쌀'의 시작이다. 개발이 활발해진 건 정부가 1995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식량법'을 개정해, 쌀 유통과 가격 책정을 자율화하면서부터다. 고급 쌀 품종을 개발해 비싸게 팔자는 동기가 생긴 것이다. 2009년 이래로 브랜드 쌀 등록 신청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1㎏에 1000엔을 넘는 고가 전략이 대세를 이뤘다.

니가타현 고시히카리 홍보 모델인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아사다 마오가 농민들과 함께 수확한 벼를 손에 들고 웃고 있다. 니가타현은 아사다 마오가 니가타 농민들과 쌀을 수확하는 모습을 담은 CF를 제작했다.

각 산지들이 값비싼 브랜드 개발에 목을 매는 건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1인당 연간 쌀 소비량 때문이다.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일본의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1962년 118㎏으로 정점을 찍은 뒤 급격히 감소했다. 2016년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54㎏까지 줄었다. 식생활의 변화로 예전처럼 쌀 수요가 높지 않은 데다, 인구마저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줄어드는 파이를 두고 경쟁하는 농가 입장에선 수익 유지를 위해 단가가 높은 쌀을 출시할 수밖에 없다.

농가 보조금 제도인 '감반(減反)' 제도가 2017년을 끝으로 폐지된 것도 브랜드 쌀 출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감반 제도란 일본 정부가 1970년 쌀값 유지와 생산량 감축을 위해 생산량을 각 농가에 할당하는 대신 보조금을 지급하던 제도다. 하지만 수요 감소와 함께 쌀 재배 면적도 줄어들고, 이 제도가 농업의 대규모화에 방해가 된다는 지적이 잇따르면서 자민당이 2013년 폐지를 결의했다. 감반 제도가 폐지된 첫해인 2018년, 각 쌀 산지는 재배면적을 늘리기보다는 '고급화' 전략을 택했다. 감반 제도 폐지에 맞춰 2015~2018년 브랜드 쌀이 우르르 출시된 것을 두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제3의 물결'이라고 불렀다.

◇'비싸도 맛있는 쌀' 찾는 사람들… 브랜드 쌀 '버블' 우려도

'고급화' 전략을 선택하는 건 현대인들이 이전보다 쌀을 적게 소비하는 대신, 조금 비싸더라도 '맛있는 쌀'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급 이미지를 구축하는 건 중국 등 해외에 일본 쌀을 수출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농림수산성은 쌀 소비량이 감소하는 가운데 쌀 농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해외시장 진출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실제 일본의 쌀 수출량은 2013년 3121t에서 2018년 1만3794t으로 5년 사이에 1만t 이상 늘었다. 맛있는 쌀에 초점을 맞춘 사업도 덩달아 확장하고 있다. 도쿄 도심 유명 백화점에는 고급 브랜드 쌀을 취급하는 '쌀 가게'들이 입점해 성황을 이룬다. 2013년 긴자에 처음 문을 연 아코메야도쿄가 대표적이다. 전국 25개 유명 고급 브랜드 쌀을 신선하게 비축해 두다가 그 자리에서 조금씩 정미해 판다는 개념이 인기를 끌었다. 반찬이나 밥솥·그릇 등 주방잡화를 함께 파는 것도 주효했다.

단시간에 여러 브랜드 쌀이 쏟아지자 "가격은 비싼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만도 제기된다. 개발과 홍보에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낭비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NHK는 "쌀 소비량이 감소하는 가운데 브랜드 쌀이 증가하는 '버블'이 몇 년 안에 끝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각 산지가 '고급화' 전략에 매진하면서, 외식 업체들이 사용하는 저렴한 업무용 쌀 공급량은 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업무용 쌀의 경우 연간 130만t 정도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업무용 쌀 가격이 40%가량 오르면서 외식 물가도 덩달아 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