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 이야기를 하면 자주 듣는 소리가 있다. "맛 차이가 나냐?" 그럼 되묻는다. "소맥도 맛있게 잘 말아주는 사람이 있잖아요." 소주와 맥주를 탄 한국산 칵테일 '소맥'도 다 맛이 다르다. 사람마다 타는 비율이 조금씩 다르고 마는 방법도 다르다. 낮은 도수에 탄산이 가미된 맥주와 높은 도수에 단맛이 가미된 소주를 어떤 비율로 섞느냐에 따라 쓴맛과 단맛이 만나는 지점이 달라지고, 어떻게 섞는지, 즉 그냥 흔드는지 젓가락으로 치는지에 따라 두 술이 섞이는 정도와 탄산량이 또 달라진다. 소맥을 예로 들며 "그래서 칵테일 맛이 다 다릅니다" 하고 설명을 이어가도 결국 허무한 답이 돌아오곤 한다. "그래 봤자 취하려고 마시는 거잖아."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한국의 칵테일 문화는 소맥으로 대표되는 자가 제조 폭탄주로 얼룩진 역사라는 농담이 있다. 어느 나라를 가도 이렇게 상당수의 음주 인구가, 본격적으로 술을 섞어 마시는 곳이 없다. 맛보다는 빨리 취하기 위해서 칵테일을 오용한 것이다.
하지만 칵테일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문화이고 언어다. 칵테일마다 사연과 역사가 있고 그 층층이 쌓인 시간 속에 새겨진 바텐더의 노력과 기술이 있다. 그래서 그 술 한잔으로도 오랜 밤을 보낼 수 있다. 몇 년 사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칵테일을 내는 바(bar)가 늘었다. 회식이 지고 혼밥·혼술이 뜬 것처럼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려는 이가 많아진 탓이다. 서울 이촌동의 '헬카페 스피리터스'는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이 되면 칵테일을 손님에게 낸다. 근처에 먹자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여덟 자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바 좌석은 일찍부터 손님이 들어찬다. 바가 찼다고 성급히 나가진 말 것. 홀에 여럿이 같이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다. 홀 한쪽에 놓인 커다란 스피커는 너른 침대에 누운 것처럼 양감이 두드러지는 푹신한 소리를 낸다. 나직이 울리는 현악기 선율을 들으며 바 카운터나 테이블에 팔꿈치를 괸다. 그러면 각 잡힌 슈트를 입고 손님을 지긋이 바라보던 바텐더가 깃털이 저절로 내려앉듯 나긋한 목소리로 주문을 받는다. 위스키와 토닉을 섞은 하이볼을 주문한다. 탄산의 쏘는 맛과 위스키의 단맛, 캐러멜 향이 수면 위로 떠오른 얼음처럼 떠오를 듯 가라앉을 듯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조화를 이룬다.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이 작가가 즐겨 마시지 않은 술이 있긴 할까 싶지만) '다이키리(Daiquiri)' 역시 열대에서 비롯된 럼의 단맛과 라임의 신맛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승강이한다. 이 집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실크 스카프처럼 부드럽고 잔잔한 열정을 담아 칵테일을 낸다면 신사동 도산공원 인근에 자리 잡은 '머스크'는 소설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처럼 격정적인 파토스를 넣은 칵테일 한 잔을 뽑아낸다. 오크통 내부 형상을 한 이곳은 밤보다 더 어두운 조도로 손님을 맞는다. 사람들은 그 어둠에 숨어 밤을 잊고 결국 끝낼 칵테일을 청한다. 동행이 있다면 바 좌석보다는 홀에 무심하게 널려있는 소파 테이블에 자리 잡고, 주인장이 편집증적으로 구해놓은 오래된 위스키를 하나씩 홀짝여보는 것도 좋다. 스코틀랜드산(産) 토탄(土炭)을 이용해 칵테일 잔에 스모키한 향을 입히고 위스키와 살구씨 증류주를 섞은 '갓파더(Godfather)'는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다. 이 집에서 영국 원산의 칵테일 '김렛(Gimlet)'을 피해 가기는 쉽지 않다. 주문을 넣으면 서글서글하게 웃던 바텐더 얼굴에 찬기가 서린다. 들어가는 재료는 진, 라임주스, 시럽 딱 세 가지뿐이다. 작은 스테인리스 셰이커에 재료와 얼음을 넣고 뚜껑을 닫는다. 바위를 깨고 땅을 긁는 북해의 파도가 치듯 격렬히, 하지만 빗줄기처럼 일정한 리듬으로 셰이커를 흔든다. 그리고 잔에 담긴 은빛 김렛 한 잔. 밤하늘에 깨끗이 선명한 줄 하나를 긋는 차가운 한 방울이 입속으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