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날개가 꺾이는 건 언제부터일까요? 세상의 잘난 녀석들에게 밀리기 시작할 때부터일까요? 머리 굵은 자식에게 무시당하면서부터일까요? 그러나 날개의 힘이 빠지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동안 날개를 떠받쳐온 바람이 있었다는 것. 그 바람의 이름이 아내일 수도 있다는 것. 그 바람을 타고 무사히 착륙하는 것이 남은 날들의 행복이라는 것. / 홍여사
“아빠, ‘나폴레옹'이 프랑스어로 무슨 뜻인지 아세요?"
아들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 중인 내게 던져진 뜬금없는 질문입니다. 요즘 녀석은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 아는 척을 하고 싶어서, 아빠와 지식을 한번 겨뤄보고 싶어서 던지는 열 살 꼬마의 질문.
"아마 '사자'라는 뜻이지?"
"맞아요. 황야의 사자. 그럼 나폴레옹의 성(姓)이 뭔지 아세요?"
"나폴레옹의 성? 성씨 말이라면 나폴레옹이겠지?"
"땡! 보나파르트예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는 룸미러로 뒷좌석 아들의 얼굴을 비춰보았습니다. 의기양양해서, 아빠의 항복을 기다리는 아들. 귀여워 웃음이 났지만, 잘못 아는 건 바로잡아줘야죠.
"보나파르트는 성이 아니고 이름이야.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지. 베토벤도 고흐도, 우리가 아는 건 다 위인의 성이야. 그러니까…."
"아니에요. 나폴레옹 1세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맞아요. 아빠가 잘못 아시는 거예요."
아빠가 잘못 아시는 거라고? 하, 요 녀석 봐라. 카시트에 실려 옹알대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나하고 옥신각신 승강이를 하려 드네. 그래 좋다. 네 말대로 집에 가서 확인해보자. 누구 말이 맞는지.
그러나 아이는 역시 아이인 모양입니다. 집에 도착하는 즉시 확인시켜 준다더니, 동생이 보여주는 새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나폴레옹은 고만 잊어버렸습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가만히 문을 닫고 '검색'을 시작했죠. 아이의 말이라고 허투루 듣고 최소한의 확인조차 하지 않는 독선적인 아버지는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어느 백과사전 항목을 클릭해 들어가 보니 제목부터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입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며 찬찬히 읽어내려가 보니,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여져 있네요. 흔히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이름이다!
난감했습니다. 아들에겐 뭐라고 하지? 아무 말 말고 그냥 넘어갈까? 하지만 저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되기는 싫었거든요. 내가 틀렸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친구 같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아들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까지 있는 저녁 식탁에서, 자진신고를 했죠.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식구들을 한 번 둘러본 뒤, 나폴레옹 얘기를 꺼냈습니다.
"민준아. 네 말이 맞더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어. 아빠가 잘못 알고 있었다. 네 덕분에 바로 알게 됐어. 고마워, 아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아들과 제 얼굴을 번갈아 봅니다. 저는 일부러 아들하고만 눈을 맞추며 아빠 미소를 지었죠. 그래도 이 정도면 쿨한 아빠지? 응? 아들은 입속의 남은 밥을 천천히 씹으며 나에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빠 앞으로는 우기지 좀 말고 제 말을 믿으시라고요. 어른이라고 아빠 말이 맞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고요. 아빠는 요즘 책도 별로 안 읽고, 학교 다닌 지도 엄청 오래됐잖아요."
내 기대와는 너무나도 다른 아들의 반응. 나는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차츰 무거워지는 기분이더군요. 하, 요 녀석 봐라. 눈높이를 맞춰주니 금방 머리 위로 기어오르네. 그러나 인제 와서 안색을 바꾸며 옹졸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쿨한 척하다가 화내는 아빠는 정말 최악이니까요. 그렇다면 나는 무슨 말로 이 민망한 상황을 벗어나야 할까요?
그 순간, 식탁에 젓가락을 놓는 '딱' 소리가 귀를 때립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맞은편의 아내가 아들을 향해 눈을 흘기고 있습니다.
"최민준! 너! 아빠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 알아? 너 미적분 알아? 가정법 알아? 아빠는 말이야, 아는 게 너무 많아서 가끔 헷갈리는 것뿐이거든. 너도 어른 돼보면 알 거야. 어른들이 얼마나 복잡한 것들을 매일 새로 배우며 사는지. 자, 이제 식사 끝. 양치하러들 가."
명령 한마디에 아이들은 욕실로 몰려갔고, 아내는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얼른 빈 그릇을 나르며 거들었죠. 왜냐하면 우린 한편이니까요. 애들 때문에 다투기도 하지만, 때론 아이들이 우리 둘을 똘똘 뭉치게 하네요. 앞으로는 점점 더하겠죠. 아버지보다 내가 세상을 더 잘 안다고 말하고, 엄마 없이도 얼마든지 잘 지낼 거라 말할 테지요. 하긴 저도 철없던 시절에 그랬습니다. 아버지와는 말이 안 통한다고, 모르시면 가만히 계시라고…. 그때마다 아버지보다 더 화를 내며 나를 나무라시던 분이 어머니셨죠. 네 아버지가 나한테는 잘못한 게 많아도, 너희한테는 최고의 아버지셨다. 아버지한테 대드는 꼴은 내가 못 본다. 오늘 저는 아내에게서 내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까는 고마웠어."
그날 밤 침실의 불이 꺼지고야, 잊고 지나칠 뻔한 고맙단 말을 아내에게 건넸습니다.
"흐음. 뭐, 고맙긴. 어서 자."
아내는 쑥스러운 듯 얼버무리며 돌아눕습니다. 오늘 하루도 버거웠던 듯, 금세 코 고는 소리가 들려오더군요. 나는 뜬눈으로 잠깐 더 머무르며, 어둠 속에서 혼자 웃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몇 살쯤부터 깨달으셨을까요? 아내에게 점수를 따는 게 최고의 노후 대책이라는 걸.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